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읽는 방법
지난 포스팅에선 왜 성경을 읽는 것이 어려운지에 대해 설명해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번 포스팅에서 해당 책, 성경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 적어보겠다.
1.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모든 책들은 각각의 책마다 쓰여진 의도가 있다. 과학책은 과학 지식을 전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고, 소설책은 작가가 창작해낸 스토리를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처럼 각각의 책들은 저마다 쓰여진 의도가 있고, 이것을 고려하여 독서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읽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책과 저자에 대해 큰 오해를 할 것이다. 과학책을 소설책처럼 읽으면 안되고, 소설책을 과학책처럼 읽으면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로, 이를 읽기 위해서는 맨 먼저 이 책이 쓰여진 의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성경이 쓰여진 의도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해당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라고 일컬어지는 구절이다.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성경이 쓰여진 의도,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이 의도를 항상 기억하면서 성경을 읽어야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그저 교양을 채우는 용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예술과 문학 등을 알기 위한 배경 지식으로 밖에 성경을 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성경을 읽는 방법이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하곤 했다.
2. 성경은 공백이 많은 텍스트이다.
성경은 공백이 많은 텍스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구절과 17장의 첫번째 구절이다.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을 때 아브람은 86세였습니다.
17:1 아브람이 99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온 마음으로 순종하며 깨끗하게 행하여라.
(창세기 16-17장)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이다. 그리고 17장에 넘어가면 갑자기 13년의 세월이 흐른다. 우리는 그냥 눈으로 훑으면서 읽기 때문에 느낄 수 없지만, 창세기 16장과 17장의 사이에는 1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적 공백이 있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 강산이 변하고도 3년이 더 흐른 시간이다. 3년 전의 나와 13년 후의 나는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이러한 시간적 공백을 인지하고 읽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변덕스러운, 끊임없이 죄를 짓는 악한 백성들로만 읽혀진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여호수아의 마지막 24장에서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언약을 갱신한다.
24:19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허물이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4:20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면 그분이 너희에게 잘해 주셨다 할지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고 너희를 죽일 것이다.”
24:21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24:22 그러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여호와를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했으므로 스스로 증인이 된 것이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24:23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없애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리라.”
24:24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그 음성에 순종하겠습니다.”
24:25 그리하여 그날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위해 언약을 체결하고 거기 세겜에서 그들을 위해 율례와 법도를 세워 주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9-25절)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3번이나 여호와를 섬기고, 그의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언약을 맺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사기'에는 엄청난 범죄와 도덕적 타락들이 적혀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 갈라서서 서로를 죽이고,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언약을 깨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사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 시절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기에 모두가 자기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
몇 페이지 전만 하더라도 3번이나 여호와를 섬기고 그에게 순종하겠다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자기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정죄하게 된다.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하는군.' '다시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졌군.'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절대 유익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타락을 보지만 정작 나 자신의 타락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못하다.
2:10 그 세대가 모두 조상 곁으로 돌아갔고 그들을 뒤이어 여호와를 모르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도 전혀 모르는 다른 세대가 자라났습니다.
2:11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으며 바알 신들을 섬겼습니다.
(사사기 2장 10-11절)
우리는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대와 사사기의 세대는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각 세대마다는 겪은 경험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윗세대는 6.25와 군부정권을 겪었지만, 아랫세대는 그렇지 않다. 각 인간의 인생은 짧다. 그 당시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는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에서 탈출해 40년동안 광야 생활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그 다음 세대는 여호수아 세대로서, 그들은 평생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뤘다. 그 다음 세대는 사사기 세대로, 따로 대규모 정복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1세대: 출애굽기 세대. 애굽 탈출 후, 광야 생활 40년
2세대: 여호수아 세대. 가나안 땅 정복 전쟁
3세대: 사사기 세대.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섬김.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까지는 무려 3세대에 걸친 대서사시인 것이다. 나는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도 굉장히 준수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어제는 죄를 회개하더라도, 오늘 돌아서서 다시 죄를 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멀다하고, 죄를 짓는 나를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꽤나 긴 시간동안 여호와께 돌아와있던 셈이었다.
때로는 구약을 읽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각자 개개인은 한 세대만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은 수많은 세대를 다루는 책이다. 그러니 수십, 수백번의 삶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한번의 삶만 살 수 있는 개인이 수백번의 삶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세대에서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긴 시간적 공백이 존재한다. 여호수아에서 사사기로 넘어갈 때에도 세대간의 시간적 공백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야말로 대서사시다. 이러한 사실을 잊은채로 그냥 눈으로 훑으면서 읽으면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바리새인들의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시간적 공백을 고려해야한다. 구약과 신약 간에는 약 400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있다.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이후로, 400년간 아무런 선지자와 메시아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기나긴 400년의 시간동안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도 절실했고, 무려 400년간이나 응답이 없는 여호와께 끊임없이 기도한 것이다. 우리는 페이지 한장만 넘기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지만, 그들은 그 챕터를 넘기기 위해 400년이라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지나와야만 했다. 이 시간적 공백을 고려하고 본다면 바리새인들이 왜 그토록 예수를 탄압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게나 열렬히 소망하고, 간구한 만큼이나 초라한 행색을 한 메시아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나는 바리새인들의 심정이 너무나 공감된다.
3. 성경은 1차 독자, 2차 독자가 있다.
많은 교회에서 성경은 바로 '당신'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서 성경이 쓰여졌다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절반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각자 개개인을 위해 쓰여지기도 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저자가 엄연히 예상한 독자층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1차 독자'들이다.
이 '1차 독자'들은 신약, 특히 바울 서신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의 경우 '1차 독자'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다. 우리는 '2차 독자'인 것이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인들이,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1차 독자들이다.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1차 독자들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책인 것이다. 한 개인을 위해 쓰여진 책도 있다. 신약에서 가장 짧은 서신서인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을 위해서 특별히 적은 편지다. 서신서들을 읽는 우리 모두는 2차 독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
1차 독자와 2차 독자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어떤 맥락에서 쓰여졌는지를 구별해야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가 처한 상황이랑 에베소 교회가 처한 상황이 다르다. 그러니 때로는 전혀 다른 삶의 적용 방안이 양쪽에 있는 경우도 있다. 한쪽에서는 해도 된다고 한 것이, 다른 한쪽에선 하면 안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각자가 마주한 상황이 다르기에 다른 삶의 적용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만약 1차 독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는 말씀을 우리 삶에 잘못 적용할 수도 있다. 이는 때로는 치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진리라고 믿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각자의 상황에 맞춰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에는 멜기세덱 제사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가 유대인들을 1차 독자로 선정하고 쓰여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린 자이다. 따라서,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의 권위가 더 높다고 볼수 있다. 그러니 그런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레위 지파 계통을 따르는 제사장보다 더 권위가 높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 멜기세덱 --> 아브라함의 레위 지파 제사장 <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
이런 논리적 구조는 유대인들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 당시 어떤 사고방식을 했는지를 고려해서 히브리서를 읽어야지만, 히브리서를 읽고 내 삶에 진정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1차 독자가 어떤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있었는지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론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첫번째, 이 책이 쓰여진 의도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 의도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우리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 안하고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이 그토록 로마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였다. 그가 누구이며,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대서사시다. 수백 세대에 걸친 이야기이고, 고작해야 한 세대밖에 살지 못하는 개개인은 이 대서사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장과 장 사이에 수십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기도 하다. 구약과 신약에는 수백년의 공백이 있다. 이러한 공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의 2차 독자이다. 따라서, 해당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누구에게 쓰여졌는지를 고려해야한다. 1차 독자는 어떤 이들이고, 어떤 문화적, 시대적 배경에서 살았는지를 고려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참 어려운 책이다. 이것을 읽는 것도 어려운데, 제대로 읽어내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읽을 때, 이만큼이나 인생이 바뀌는 책은 없다. 수많은 인물들은 성경의 단 한 구절을 가지고 본인의 인생과, 역사를 바꾸었다. 이는 한 절, 한 절이 그만큼이나 힘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성경의 한 구절, 혹은 한 장을 통해 인생이 바뀐 사례들의 예시이다.
1. 성 안토니우스: 3-4세기 경 살았던 이집트 출신의 수도자. 그는 최초의 수도회를 세우고 '모든 수도승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마태복음 19장 21절, [만일 네가 완전해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를 가지고 평생을 수도자로 생활했다.
2.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기 4세기경 활동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13장 13-14절,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를 읽고 회심해서 세례를 받았다.
3. 마르틴 루터: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단 한 구절을 가지고 종교 개혁을 이루어냈다.
4.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 주인공 라스꼴니코프에게 소냐는 요한복음 11장, 죽은 나사로를 예수가 부활시키는 장면을 읽어준다. 이 낭독은 라스꼴니코프의 내면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다. 결국 라스꼴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인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성경이 읽기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모든 구절들이 힘이 있다는 말이다. 때로는 한 구절이,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