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석열

이렁비니 2025. 1. 23. 01:23

12.3 계엄 사태 이후로 우리나라의 정치권이 굉장히 시끄러워졌다. 사회는 양 극단으로 나뉘었으며 한쪽은 탄핵 찬성을, 반대쪽은 탄핵 반대를 지지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왔으며 법원 등이 폭동으로 인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개신교인들은 '탄핵 반대'를 외치며 윤석열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천주교 등과 같은 다른 대다수의 종교들은 윤석열 탄핵에 찬성하지만, 왜 하필 개신교인들만 '탄핵 반대'를 외치는 비율이 높을까? 여러가지 정치적, 역사적 문제들이 얽혀있지만, 그것까지 다 살펴보기엔 지금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기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우리는 '윤석열'을 어떻게 보는가?

왜 이 사단이 났을까? 그 근원적 문제에는 대한민국 국민이 '윤석열'이라는 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근간에 깔려있다.

만약 사람들이 윤석열을 어떠한 직책도 없는 '자연인' 그 자체로만 바라보았다면 일은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정치가 윤석열의 체포를 두고 시끄러운 이유는 '대통령'이라는 직급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은 우리가 윤석열을 '자연인 윤석열'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국민들은 '대통령'이라는 직급에 맞는 어떠한 역할을 윤석열이 하길 기대한다. 그 역할은 각자의 정치 성향마다 다를 수 있겠다. 누군가는 복지에, 혹은 국방, 혹은 경제 등등.. 견해는 다르지만 '대통령'이라는 직급으로서 윤석열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자신의 직급에 합당한 어떠한 것을 하길 원한다. 따라서 현재 많은 탄핵 찬성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 분노는 '윤석열'이라는 자연인에 대한 분노라기 보단, 윤석열 '대통령'이 한 사태에 대한 분노이다. 우리중 대다수는 윤석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 원한으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윤석열'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이재명이었어도 사람들은 '계엄 선포'를 했다면 분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치적 혼란은 대통령이 '윤석열'이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계엄선포'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계엄 선포의 조건

계엄을 선포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제약들이 있다.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다고 하는데, 일단 그러한 점을 제쳐두고서 '계엄 선포'가 되기 위한 정말정말 기초적인 조건들만 살펴보면 2가지가 있다고 본다.

1. 윤석열이 '대통령'인 상태.
2.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상태.

만약 윤석열이 대통령이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혹은 대통령이어도 다른 나라의 대통령이었으면 '계엄 선포'라는 조건은 성립되지 않는다.

윤석열은 '대한민국 대통령'이기 때문에 계엄 선포를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이 2가지 조건중 하나라도 성립이 안되었다면 계엄 선포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회의 동의, 등등 절차를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기독교의 '용서'의 개념을 윤석열에 적용시켜야 하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태복음 5장 39절)

 

성경에는 오른편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한다. 즉, 이에는 이로 갚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이번 사태에도 적용시켜야 하나?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을 대적하지 말며 용서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가 앞서 말한, 윤석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윤석열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윤석열을 '자연인'으로 바라본다면 그를 용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벗어버리고 그를 바라본다면 그 또한 몇몇 극우 정치 유튜버들에게 영향을 받은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용서해야하는가? 

 

하지만 우리는 윤석열을 '대통령 윤석열'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가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 올려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것은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역할을 윤석열에게 국민들이 기대했다는 가정 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용서'의 관점에서 그래도 윤석열을 용서해야하지 않을까?

맞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인 윤석열'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책임이 막중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선 때로 큰 심판을 하셨다. 

2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재앙을 내릴 것이다. 내가 네 자손들을 쓸어버리겠고 종이든 자유인이든 가리지 않고 아합에게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를 끊어 버릴 것이다.
22 내가 네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만들 것이다. 네가 내 진노를 자아냈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했기 때문이다.’
23 그리고 이세벨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개들이 이스르엘 성벽 옆에서 이세벨을 먹을 것이다.’
24 아합에게 속한 사람이 성안에서 죽으면 개들이 먹을 것이며 들판에서 죽으면 공중의 새들이 먹을 것이다.”
25 아합과 같이 여호와의 눈앞에 악을 행하려고 자기 자신을 판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1장 21 - 25절]

 

하나님은 아합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재앙을 내릴 것이라 말씀하신다. 어떻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아합이라면 억울하지 않을까? 아합은 자신의 아내, '이세벨'이 자신을 충동질했다고 그녀에게 잘못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합도 이세벨에게 당한 피해자일 수 있다. 하지만 여호와께선 아합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처참하게 죽고, 그가 죽으면 개들이 죽은 아합의 피를 핥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실제로 그 예언대로 진행되었다.

37 그렇게 왕이 죽었고 사마리아로 옮겨져 묻혔습니다.
38 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못에서 그 전차를 씻었는데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말씀대로 개들이 죽은 아합의 피를 핥았습니다.
그 못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2:37-38]

 

왜 하나님께선 아합을 용서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는 자연인 '아합'이기 이전에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선 이처럼 사회적 직책이 높은 이들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신다. 그는 '왕'이라는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가진 자였고, 그가 고꾸라지면 온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고꾸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합 왕을 증오했다'가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다고 읽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것은 피의 복수가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이다.

그의 탄핵,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는 탄핵되어야 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잘못이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를 이렇게 만든 원인에는 여러 극우 유투버들과 배우자를 포함한 주변인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또한 어쩌면 피해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판을 받는 아이히만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도운 아이히만의 법정에 참석해서 유명한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와 괴벨스에 선동당해서 유대인 학살을 돕게 된 피해자였을까? 그는 단순히 명령에 따르던 '도구'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데 일조했다. 만약 감정적으로 이에 이입한다면 그는 수많은 이들을 죽인 학살자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따져본다면, 그는 나치의 선동에 선동 당한 하나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무죄인가? 한나 아렌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유죄이며,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도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치는 탁아소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하나의 도구로서 가담한 '유대인 대학살'은 전례가 없는 전쟁범죄이다. 왜냐하면 이 대학살은 그가 이 지구(세계)를 다른 민족과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지지하고 수행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먼저 이 지구에서 인류와 더불어 살아가기를 거부했다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사형선고'는 어떠한 복수심에서 시행되기 보다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도출된 합리적 선고이다. 아이히만이 먼저 이 지구에 유대인과 함께 살기를 거부했으므로, 그를 이 지구에서 격리시키는 개념으로 '사형선고'를 선고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에 대해 로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형수, 타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침해한 자는 자연법을 위반.
따라서 자연적 공동체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잃는다. 이것은 전 인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이 관점을 아이히만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쟁 범죄에 가담함으로, 전 인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관점을 윤석열에 적용시킨다면 어떨까? 나는 비슷한 관점이 가능하다고 본다.

 

먼저 우린 그를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에 대한 어떠한 기본적인 최소한의 암묵적 약속이 있다.

아무리 무능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그 직책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반국가세력'으로 뭉뚱그려서 함께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살아가길 거부했다. 따라서 이 점만 보더라도 그가 탄핵될 사유로 충분하다고 본다.


탄핵은 대통령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탄핵이라는 권리는 민주주의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이다. 그리고 이 권리를 행하는 것을 막는 것이,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다. 그가 먼저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이길 거부했으므로, 그를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이 모든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직급을 벗어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온다면 회복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탄핵 심판은 그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직급에서 분리시켜야 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재판이다. 내란죄 = 사형 or 무기징역,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향후에 탄핵된 후에 벌어질 형사 재판에서 선고될 일이다.

 

내란죄가 이렇게 형량이 무거운 이유 또한 위와 같은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내란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사회적으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길 거부한,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사회와 격리시켜야 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통한 것이다. 이 형량은 어떠한 피의 보복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책임이 막중한 만큼, 더 엄격한 잣대가 들이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는 생각하는 바를 단순히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실천은 때로는 우리 사회의 존립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