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영적 세계에 대해서
오랜만에 '생명의 삶'을 묵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다.
하버드대학의 뇌 과학자이자 신경외과 의사인 이븐 알렉산더는 7일간 뇌사 상태로 있다가 살아나 [나는 천국을 보았다](Proff of heaven)라는 책을 썼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체험은 육체와 뇌의 죽음이 의식의 종말은 아니라는 것,
인간의 체험이 무덤을 넘어서서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중략)
우리는 이따금 영적 체험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 인간 체험, 세상 체험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세상이, 물질이 전부인 줄 압니다. 죽음이 끝인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 존재고, 우리의 신분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지난번에 교회에서 진행한 리더쉽 캠프에서도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천지의 범위에 눈에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초월의 영역, 즉, 영적 세계의 창조 또한 포함된다고 강의한 적이 있었다.
21세기에 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는 이처럼 교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고방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경의 맨 첫부분인 창세기 1장 1절부터 오독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두란노의 저 글을 쓴 저자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보이는 세계'에서의 권위를 빌려왔다. 바로 '하버드 대학', '뇌 과학자', '신경외과 의사'이다. 좋은 대학교와 뇌 과학자, 의사라는 좋은 직업은 눈에 보이는 물적 세계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저러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말하는 말에는 신뢰도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거하는 근거로 '보이는 세계'의 권위가 타당할까? 어떻게 보이는 세계의 권위있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거한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증거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아예 성경에 대놓고 처음부터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묘사를 창세기 1장부터 적어놓았더라면 훨씬 더 쉽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후대의 주일학교 교사님들의 머리는 덜 아프지 않았을까? 창세기는 도대체 왜 이렇게 쓰여졌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일까?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본다면 보이지 않는 것, 어떠한 초월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이 보이는 것만 믿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특이한 케이스이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 (흔히들 '신'으로 부르는 존재)를 믿었다. 사람들이 믿는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서 그 신앙은 '힌두교', '신토', 이슬람교', '기독교' 등 다양한 이름의 종교로 불리었다.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믿음을 가졌습니다. 근래 서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불신앙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드문 현상입니다. 음치여서 음악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음악에 무언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하듯, 서구의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뭔가 중대한 것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종교와 과학에 관한 질문들 (존 폴킹혼) (33p) -
통상 현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과학자'를 제외하고 '종교'와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은 이들은 바로 '철학자'들이다.하지만 근대 이전의 철학자들조차도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철학을 하지 않았다. 고대 철학자로 유명한 '플라톤'은 우리에게 [국가]등의 저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던 플라톤의 저서는 [티마이오스]였다고 한다.
[티마이오스]는 기원전 360년경 쓰여진 플라톤의 저작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세계의 창조를 이 책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궁금증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화들은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이 세계가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설명한다. 데미우르고스는 모든 시원들을 사용하여 하늘의 영혼과 생물체들의 영혼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하늘의 영혼을 맨 먼저 만들고 그 다음 4원소로 하늘의 몸을 만든 다음, 하늘 영혼을 만들어 섞고 남은 시원들을 섞어서 생물체들의 영혼을 만들었다고 한다.
설득력이 전혀 없는 창세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비해서 성경의 '창세기'에는 수많은 설명되지 않는 구멍들이 보인다. 빠진 부분이 너무 많았다.
창세기는 생명체들의 탄생은 이야기하지만 신과 세상을 잇는 존재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천사의 정체도 뚜렷하지 않다. 영을 이야기하지만 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원후 4세기경 로마를 다스린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 지점을 두고 기독교를 비판했다.
그는 성경의 창세기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창조 이야기를 비교하며 플라톤의 고전 신론이 더 우월하다고 입증하려 했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움직이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이 '창조된 존재'인지, '창조되지 않은 존재'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점들은 수십년간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논쟁을 벌이는 지점이었다. 성자는 '창조된 존재'인가? 아니면 '창조되지 않은 존재'인가? 성자가 만약 창조된 존재라면, 즉 처음부터 있던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일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되지 않은 불변하는 존재이다. 그에게 따르면 창세기는 불완전한 설명이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설명은 탁월하다. 왜냐하면 물질 세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도 명확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티마이오스]에서 묘사되는 것에 비해 '창세기'에서 묘사되는 창조 과정은 너무나도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다.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오며 이렇게 생략된 부분들은 과학 지상주의자들이 성경을 공격하는 약점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 성경은 빅뱅이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쿼크와 글루온 입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블랙홀과 초신성이 어떻게 생겨나고 소멸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간략한 구절로 이 모든 것을 축약하여 설명한다.
성경이 묻는 질문: Why?
과학과 종교에는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진다. 반면에 종교는 본질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학은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생겨났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반면 종교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뒤에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를 묻는다. 한마디로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유명한 과학 만화 시리즈는 'Why?'가 아닌 'How?'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준다. 빅뱅 우주론을 통해서 말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과학은 해준다. 하지만 '왜'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플라톤이 쓴 [티마이오스]는 창조 신화라기보다는 '과학 서적'에 가깝다. 왜냐하면 [티마이오스]는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기에 창조의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되어야 한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였는가, 그 창조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관점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성경을 오독하게 되는 것이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성경에는 분명하게 이 세상의 '창조 목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골로새서에는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비록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다시 평화를 이루고 화해시켰다고 설명한다.
만약 성경이 과학책처럼 'How?'라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다면?
만약 성경이 과학책처럼 '어떻게' 이 세상이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을 언급하고 싶다.
우스 땅에 살던 욥이란 인물은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갖은 고난과 고통을 겪는다. 그가 받은 고통이 어찌나 심한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무려 7일 동안이나 욥과 함께 밤낮을 보내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욥에게 여호와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신다. 그는 욥에게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나오라고 명령하곤 수많은 질문 공세들을 퍼붓는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기 38장 2-3절)
다음은 여호와가 욥에게 했던 질문들을 몇가지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들이 현대 과학의 어떤 분야와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이 어디에 있었는가? (지질학)
- 누가 그 크기를 정했는가? (지질학)
- 단단한 기초는 무엇위에 세웠으며,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는가? (지질학)
- 바닷물이 쏟아질 때 문을 막은 자는? (지질학)
- 바다의 근원에 간 적 있는가? (지질학)
- 땅이 얼마나 드넓은가? (지질학)
- 빛의 근원에 간적 있는가? (광학)
- 눈의 창고와 우박의 창고를 본적 있는가? (기상학)
- 해가 뜨는 곳에 가보았는가? (천체물리학)
- 동풍이 불어오는 곳을 아는가? (기상학+ 카오스 이론)
- 누가 광야에서 비가 내리게 하는가? (기상학)
- 얼음이 누구의 태에서 만들어졌는가? (열역학)
- 때에 따라 별자리를 낼 수 있는가? (천체물리학)
- 하늘의 법칙을 아는가? (천체물리학)
- 번개를 보낼 수 있는가? (전자기학)
- 산양이 언제 새끼를 낳는가? (생물학)
- 암사슴이 몇달만에 만삭이 되며 언제 새끼를 낳는지 아는가? (생물학)
등등... 너무나도 많아서 다 적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하나님은 욥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만약 욥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했다며 어땠을까? 욥은 수천년 전에 살았던 기원전 사람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욥은 땅의 기초를 놓는 과정은 커녕 타조 하나가지고서도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13. 타조가 재빠르게 날갯짓을 한다마는 그 날개와 깃털이 황새만은 못하지 않느냐?
14. 타조는 그 알들을 땅에 낳고 흙 속에서 따뜻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고
15. 누가 발로 밟든, 들짐승이 깨뜨리든 상관 않고 잊어버린다.
16. 타조는 자기 새끼가 제 것이 아닌 듯 신경 쓰지 않는다. 산고가 헛수고가 되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17. 이는 나 하나님이 타조에게서 지혜를 없애고 지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타조가 그 몸을 높이 쳐들고 뛸 때는 말과 그 기수를 우습게 여기는 법이다.
(욥기 39장 13 - 18절)
만약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이 빅뱅이론이나 양자역학, 물리학 등에 대해 설명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욥의 머리는 과부하가 걸려서 욥은 미치거나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어떻게' 이 세상이 작동되는지 그 원리를 깨닫기 원하시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욥이 자신의 고통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길 원하신다.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
(욥기 42장 5절)
성경에 대해서
하나의 유머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상해보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우주의 탄생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위와 같은 설명은 현대인들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기원전의 모세도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설령 모세가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 위 내용을 전부 이해했다 할지라도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경이 쓰여진 목적은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 세계를 '누가', '왜'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근대과학의 선구자 대부분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갈릴레오와 같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거나 뉴턴처럼 비정통적 지성을 가진 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진지한 신앙인이었다. 또한 성경을 인쇄하기 위해 보급된 금속 활자는 인쇄술의 발달로 이어지며 이는 과학의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플라톤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의 차이점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창조 신화, [티마이오스]는 진정 성경의 '창세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있는가?
이 두 비교는 사실 애초에 비교 불가능하다. 그 두 책은 쓰여진 목적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이 자유로운 분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어떤 우주든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알아낼 수 없으며 직접 관찰하며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만 했다. 이러한 지점은 플라톤주의자들이나 그리스인들이 놓친 지점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질서를 심사숙고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또한 창조 세계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이를 찔러보고 연구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고 때때로 이는 하나님을 더욱 잘 인식하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