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이야기중 가장 믿기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활을 빼놓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고백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성경의 이야기는 그 의미가 사라진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덤에 묻혀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가 죽었고, 완전히 부패했따면, 그렇다면 그는 단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교사에 불과하며 더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고아가 되어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된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인가?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의 부활을 있는 그대로 확실하고 완전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들은 부활이 다른 사건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유비'를 활용했다. 유비란 두 가지의 개념들의 관계와 다른 두 가지의 개념들의 관계 사이에서 성립되는 동등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사건, 사물, 혹은 사람 간에 의미 있는 유사성을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식물 사이에 유사성이 많고 분명하다면, 그 둘은 같은 종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반대로 거북이와 운동장처럼 둘 사이는 유사성이 너무 적고 희미하다면, 둘을 가지고 유비를 활용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둘간의 관계에는 크게 유사점이 없다.
거북이 | 운동장 |
살아있다 | 죽어있다 |
작다 | 크다 |
움직일 수 있다 | 움직일 수 없다 |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대해 메세지를 선포할 때, 그들은 유비를 활용했다. 부활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사건과도 전혀 비교할 수 없고, 유비가 불가능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일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누구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 사건을 어떤 것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을까?
에게이로 (έγείρω): 일으킴을 받는다.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이 마치 누군가 잠에서 깨어나는 일과 같다고 설명.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 일어서다.
예수가 두 발로 다시 일어섰다고 이야기한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린도전서 15장 35-36절)
이 구절에서 바울은 부활을 자연 세계에서 싹이 트는 것에 부활을 비유했다. 겨울의 죽음이 지나간 후에는 봄의 새 생명이 온다.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임신과 출산의 경이로움을 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중에 '처음으로 나신 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29절)이심을 떠올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자연 법칙의 경이로움을 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떠올렸다. 하지만 부활이 일반적인 자연 법칙과 다른 점은 부활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유일무이한 부활이라는 사건
부활이라는 사건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이 성립될 수 있을까?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부활이 과거 특정 시점에 실제로 일어났기에 '역사적 사건'이라 불려야 하고,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입증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죽음은 기원전 44년, 단 한번만 일어났다. 왜냐하면 카이사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같은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본다면, 이는 단 한번만 일어나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판넨베르크는 현대과학이 결정론적 세계관을 깨뜨렸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물리법칙을 가진 우주를 창조한 뒤에는 언제나 그 법칙을 존중하며 그 법칙을 뛰어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17-18세기의 고전적 이신론자들이 취한 입장과 동일하다. 이러한 관점에선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영광스럽고 궁극적인 생명으로 일으키셨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판넨베르크가 보기에 현재의 '자연 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특이한 사건이거나 역사에서 단 한번만 일어나는 사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선한 이유로, 때론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으시며, 예수를 살리는 일과 같은 특별하고 심지어 유일무이한 행동을 하시는 길을 차단하지는 않으신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부활 사건과 현대의 유사 사례간의 차이
칼 라너(Karl Rahner)라는 신학자는 부활 체험이 지닌 독특한 속성을 강조했고, 이것을 철저하게 독특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부활은 교회 역사의 특정 시기에만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며, 초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선택받은 증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요한복음 20장 29절을 가지고 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9장 29절)
사도를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도들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특별한 단 한번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겪은 부활 체험은 신약성서에 묘사되는 다른 환상 체험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다. 예를 들어, 부활 체험은 결코 꿈꾸는 중에 일어나지 않는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제외하면, 사도행전이 언급하는 여러 '계시 사건'(16:9-10, 18:9, 23:11, 27:23-24)처럼 밤 중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황홀경 상태에서 부활 체험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신약 성서에서는 '환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정작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난 사건에서는 이 표현을 단 한번만 쓴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26:19)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몇몇 개개인에게만 모습을 보이신게 아니라, 500명에 달하는 집단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 15장 4-6절)
그들이 보았다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에도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증언들이 있다. 필립 위브는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고 얘기한 사례 28건을 연구했다.
이를 통해 그들의 경험이 신약에 기록된 부활한 예수 사건과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사례자들은 다양한 교파에 다양한 연령대(14세에서 91세까지)의 다양한 상황에서 예수를 체험했다. 이러한 사례와 신약의 제자들의 부활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성이 있다.
-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사건의 주도권은 오롯이 예수에게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 시작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 마태, 누가, 요한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환경과 일상 가운데 일어났다.
-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고통과 고난의 시기를 겪는 가운데 환상을 경험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러한 부활 체험 증인과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예수의 제자들이 겪은 부활 체험 간에는 차이가 있다.
오늘날 예수를 체험했다는 이들은 하나 같이 환상 가운데 만난 인물이 예수라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서에 기록된 사건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심하고,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복음 28장 16-17절)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한복음 20장 14-15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한복음 21장 4절)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누가복음 24장 15-17절)
이처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한동안 그가 예수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또한, 현대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이들은 거듭해서 영광스러운 광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의 경험을 제외하고선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이러한 광채를 언급하지 않는다.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장 3-5절)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약성서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희생당한 예수를 회복시켰고, 그렇게 하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람의 부활과 모든 것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을 처음으로 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오늘날 사별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들, 세상을 떠난 배우자와 만나는 일과 비교하면 어떨까?
W. 데위 리스는 [사별한 가족이 겪는 환각]이라는 논문에서 유족들이 사랑하는 고인을 만나는 경험을 연구했다. 전체 293명 중 46.7%에 달하는 사람들이 하루 중 여러 번 죽은 배우자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또한 고인의 모습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드물게는 손길을 느꼈다고 답했다. 사별한 배우자들을 다시 만나는 경험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대체로 유익했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큰 차이들이 있었다.
- 그들 중 72.3%에 달하는 사람들이 연구를 하기 전까지 가까운 친인척이나 친구에게도 이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예수를 만났던 이들이 재빠르게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이다. 베드로, 바울 등은 알리는 것을 넘어서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기꺼이 선교사가 되었다. - 또한 고인이 된 배우자를 다시 만난다 할지라도, 이내 고인이 여기에 없다는 슬픈 깨달음이 뒤따라온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후 부활하였을 때, 영광스럽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지,
이내 고인이 여기 없다는 '슬픈 깨달음'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큰 기쁨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누가복음 24장 52-53절)
예수 그리소드의 부활의 증거: 빈 무덤
신약에는 여럿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들이 쓰여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저마다 서로 다르며 혼란스럽다. 어떤 복음서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출현했다고 하지만, 어떤 복음서에는 갈릴래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학자 폴킹혼은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오히려 이 증언이 '참'임을 증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꾸며낸 이야기들의 모음에는 이런 불일치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날 것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불일치를 통해, 복음서의 기록들에는 작위적인 승리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큰 승리이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가장 화려하게, 부활을 묘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만약 부활이 후대의 제자들이 꾸며낸 전승이라면, 그들은 가능한 한 화려하게 그 사건을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활 사건에는 자칫하면 제자들에게 불리할 수 도 있는 것들도 묘사되어 있다. 바로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했다는 주장이다.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태복음 28장 12 - 15절)
하지만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실제로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증거를 뒷받침한다.
만약에 부활이 후대에 꾸며낸 전승이라면, 세 여인이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진실로 자신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려고 했다면, 여인들이 아닌,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무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여성의 증언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부활을 목격한 첫 증인을 여성으로 서술한다. 전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불리한 내용을 넣지 않는다.
부활에 관한 복음서에는 '빈 무덤'에 대한 묘사가 적혀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 '빈 무덤'이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라 말한다.
그 당시 대제사장들 또한 무덤이 비어있었단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받아들인다. '빈 무덤'은 단순히 '비어있는 무덤'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승리하셨다는 증거이다. 십자가 죽음과 매장이라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변화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돌덩이는 '굴려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라 예수는 '살아나셨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 일하심이 드러난다.
부활을 믿느냐는 바로 이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 일하심을 믿는가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알지 못하지만, 때론 그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3일만에 부활하여 죽음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형제들이여,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되새겨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전해받았고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그 말씀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의 말씀대로 3일째 되던 날 다시 살리심을 받아..
(고린도전서 15장 1 -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