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채우시는가?
크리스천들이 재물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흔히들 나오는 어떠한 패턴이 있다.
- 어떠한 일을 해야하는데 재정이 부족하다. ('돈'이라는 단어 대신에 '재정'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 절망적 상황. 인간적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 기도를 한다.
-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 이 과정을 간증으로 나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어떻게 채워주시는가?'는 항상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서술 기법으로 본다면 'Deux ex Machina'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곳간을 채워주시는 요술방망이신가?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재물을 채우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재정을 채워넣어야할 의무가 있으신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이 우리의 곳간을 채워놓아야할 어떠한 의무가 있는가를 따져보았을 때, 전혀 없다. 그분은 스스로 온전하신 분이기에 하나님께선 우리를 무심하게 내버려둘 수도 있다. 따라서 "주님, 저의 현재 재정 상황을 도와주세요"라는 기도 간구에 하나님께선 굳이 답하실 의무가 없다. 이것은 냉정해 보인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때로 냉혹해보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이사야서 41장 10절 구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냉혹하게 말하신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1장 14절)
주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라면서, 주님께선 '버러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어 번역본으로는 'worm'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히브리어로는 '구더기'(톨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알게 되고 충격이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구더기 보듯 바라보시는건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사랑받을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구더기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그 사랑이 워낙 크다는 점도 있지만,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나님께선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었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지 않으셔도 되었다. 하지만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으시다. 그런데 개입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거부하더라도 개입하신다. 왜? 사랑하시기에.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거부한다. 왜? 우리는 애초에 죄인이기에, 구더기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nothing)으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적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제가 아무것도 아님을
올바르게 느끼게 하시고
이에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럴수록 주님의 선하심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하소서.
[키르케고르의 기도문 1839년 5월 14일]
따라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의 어떠한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간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간구하기 이전에 나 자신의 'nothing'을 마주하는 것, 그러나 절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가난해야한다는 것인가?
굉장히 자주 나오는 질문들이다. 먼저 이 지점에 대해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장 헷갈리는 것이 '돈'은 나쁘지도 선하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 가난하다면 쉽게 돈에 유혹에 빠지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선하다고 보는 것은 언더도그마에 빠진 것이라고 본다.
인도네시아에서 한 선교사가 힘들게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몇년 뒤, 자신이 개척한 교회가 모스크가 되었단 소식을 듣는다. 알고보니 선교사가 귀국하면서 조금씩 재정적 지원이 끊겼고, 교회는 자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찾아와 교회를 향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우리가 후원해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다.
재정적 자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이 너무 많아서 교회가 무너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 예시처럼 돈이 너무 없어서 교회가 무너질 수도 있다.
결국 '돈'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가를 따져보았을 때, '자율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왜 기득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가? 기득권들이 정치인들을 가장 많이 후원하기 때문이다. 김상욱 의원이 말했다. 자신이 국민의 힘이었을 땐 기부금의 액수가 한 사람이 '몇 억'씩 큰 규모로 했다. 그런데 민주당쪽으로 넘어오니까 기부금의 액수가 만원, 이만원...씩.... 조금씩 엄청 여럿이서 내는 기부금이 모였다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의 기부금으로 교회가 운영된다면 그 소수의 목소리만이 대변될 수 밖에 없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경제권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면 그 경제권을 가진 사람에게 자유가 박탈될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2-13절)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 진짜 하나님께서 요술방망이처럼 필요에 따라 바울에게 부족한 재정을 채워주셨기 때문일까? 만약 그랬다면 사도 바울은 텐트 만드는 기술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텐트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그는 회당에서 설교했다. 그가 설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텐트 만드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행전 18장 4절)
그에겐 텐트 만드는 기술이 있었으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텐트 만드는 기술'을 의지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어폐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만큼이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선교에 나선 사람도 없다.
유대교의 한 종파 중, '하레디'라는 종파가 있다. 그들은 폐쇄적이고 근본주의적 성향을 띈다. 그들은 토라 경전 연구를 집중적으로 한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만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병역부터 경제활동, 정식 교육까지 이렇다할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대교 경전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 늘어나니 이스라엘 정부에서도 골칫덩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JR4EYye2yM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랍비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우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도 이 점을 말했다.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립보서 3장 5-6절)
하지만 사도 바울은 '텐트 만드는 일'을 했다. 그에겐 '텐트 만드는 일'이 밥벌이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로든지 필요로 하는 곳으로 선교를 떠날 수 있게 하는 '경제적 자유'였다.
왜 하나님을 찾는가?
왜 하나님을 찾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간다. 대출을 받고 싶으면 은행을 간다. 배가 고프면 식당을 간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돈이 없어서?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본다. 돈이 없으면 재테크나 가계부 쓰는 법, 통장 쪼개기, 짠테크... 등등을 배우면 된다. 아니면 비트코인이나 미국 주식, 등 자산에 투자를 하면 된다. 아니면 자신의 몸값을 올리던가.
잘못된 질문을 가지고 가니, 답이 안나온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누가복음 7장 24-26절)
예수님께선 말한다. 왜 너희가 광야에 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보러 왔나? 사치스러운 것,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왜 왔느냐. 나는 이 관점이 맞다고 본다. 본질적인 질문은 "왜 하나님을 찾는가?"이다.
생존편향
수많은 재정과 관련된 기독교 간증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생존편향'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중에는 재정적 문제가 끝끝내 해결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간증하지 않는다. 간증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간증을 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간증이다. 스스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간증을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시편 88장처럼 끝까지 절망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무사귀환한 전투기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총탄 자국이 편중된 곳의 철판을 강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엔 큰 오류가 있었다. 이 데이터는 살아 돌아온 폭격기에만 한정되어있었고 추락해서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의 분석은 없다.
따라서 손상이 잦은 부분은 손상이 나도 돌아올 수 있는 부분이고, 손상이 되지 않은 부분이 진짜 보강해야하는 부분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의 간증을 듣고 청취자가 희망을 가졌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 청취자에겐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겐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인가? 결국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 '나의 필요를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은 필요 없어!'라는 생각까지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간증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 간증을 듣는 자들이 시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돈 문제 뿐만이 아니다.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왜 예수님께선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역으로 스스로에게 한다면, '왜 나는 예수님을 찾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왜 나는 예수님을 찾는 것인가? 그는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사해 부근에서'에는 아픈 자식을 둔 한 아버지의 예시가 나온다. 안드레아는 소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며 환자들을 낫게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희망을 그 예수 그리스도께 걸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마주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자였다.
‘아이를 낫게 해준다면…’
그는 노를 저으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다.’
호수 건너편에 닿자 석양은 민둥산과 계곡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안드레아는 큰 소리로 예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지면서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자 그 정적 속에서 산그늘 여기저기에서 가냘픈 방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까이 오지 말라는 나환자들의 안타까운 경고였다... (중략)
“당신은 아무것도 못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야”
안드레아는 예수를 손가락질하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허물어지듯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날이 밝았다. 밤새워 아이의 시신을 지켜준 여인들이 돌아가고 안드레아와 아내만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여인들이 호숫가에서 꺾어온 꽃이 죽은 아이의 머리맡에 꽂혀 있었다. 아이는 잠든 것처럼 작은 손으로 주먹을 꼭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쓸모없는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 억울했다. 예수의 제자가 말한 것처럼 억울함은 예수에 대한 분노로 꿇어올랐다… (중략) …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예수는 초가을에 갈릴래아 호숫가 마을에서 쫓겨났다. 차가운 안개비가 내리는 날, 예수와 제자들은 5개월 전 그토록 환영했던 자들이 욕설과 돌팔매질을 해대는 수모를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안드레아도 군중 속에 섞여 예수에게 돌을 던졌다. 그가 던진 돌이 예수의 홀쭉한 볼에 맞아 피가 흘러내렸다.
“쓸모 없는 인간…”
군중과 함께 안드레아도 외쳤다.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
..(중략)… 이듬해 5월, 안드레아는 아무 쓸모 없던 그 사나이가 제자들한테서도 버림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안드레아는 저녁놀을 받아 엷은 갈색으로 빛나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지치고 움푹 들어간 슬픈 눈을 한 예수의 피 흘리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아픔이 그의 가슴 깊은 곳을 훑고 지나갔다.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제자들이 그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함께 모두 무너졌다.
그야말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는가? 자신의 모든 소망이 무너진 것을 마주한다. 십자가 죽음과 함께 제자들이 꿈꿨던 이상은 다 무너졌다.
그들은 다 도망쳤고, 뿔뿔히 흩어졌다.
하나님께선 재물을 채우시는가?
그럴 수 있으신 분이다. 그분에겐 우리의 재물을 채워야 할 의무가 없지만, 하나님께선 우릴 사랑하시기에 재물을 채워주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요소가 '만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시며 하나님께선 신실하시게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다. 그렇다면 만나와 메추라기를 끊으신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위 질문을 다시 정리해서 묻자면, "만약 하나님께서 재물을 채우시지 않으신다면,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이 질문에 'yes'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나도 어려울 것 같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할 수 있길 기도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장 17-1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