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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나'를 탐구하는 종교인가?

이렁비니 2024. 5. 17. 01:02

많은 2-30대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다. 여행을 간다거나,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나'가 누구인지 찾기 위한 경우가 많다. 교환학생을 가거나, 해외 워킹홀리데이도 대부분의 경우 마찬가지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2-30대는 남이 정해준 루트에 따라 입시를 치르고, 대학교를 가고, 취업준비를 한다. 따라서 20대가 된 후,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시기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나'를 찾는 것은 청춘의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불행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려 한다는 것은, 현재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만큼이나 불행한 일은 없다. 그러니 수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을 떠나고, 세계일주를 하면서까지 내가 누구인지 필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종교들에서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내가 누구인가?'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작품)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특히 불교에서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는 것 같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해 참된 '자아'를 찾는 것. 그래서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경지에 오르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인것 같다. 참된 '자아'를 끊임없이 찾는 것. 이것은 평생에 걸쳐 수행해야하는 것이다. 수많은 고행자들과 수도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경우는 어떨까. 기독교에 있어서도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사실 기독교인들에게 '자아정체성'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이미 너무나도 명확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정체성을 굳이 더 찾아헤멜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다. 내가 아무리 이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쳐보아도 이 사실을 명백한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도망칠 수 없다. 따라서 결국엔 이 '주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이 불교랑 굉장히 대비되는 지점인것같다. 불교의 경우 '내가 누구인지' 사람들이 너무나도 찾고 싶어한다. 몇몇 사람들은 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수행을 쌓는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반대이다. 명백한 정체성을 가르쳐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그토록 찾고 싶어하던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눈 앞에 가져다두면 정작 거절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다. 인간의 심리란 참 알수 없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 또한 마찬가지로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해당 정체성을 마주하게 되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이 정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끝까지 도망칠 것인가. 

 

어쨌든 내가 '주의 자녀'라는 이 정체성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인생의 그 다음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의 정체성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은 굳이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 헤멜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주의 자녀'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가장 큰 문제는 해결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인가, 라는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지? 여기서 기독교의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이웃 사랑

이웃 사랑이란 기독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가치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수많은 광고, 매체에서 '나를 사랑하라'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너머의 영역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그러니 불완전한 나 자신이 완전한 사랑을 하기란 애초에 모순이다. 따라서 사랑은 나의 내부에서가 아닌, 나의 외부에서 찾아와야만 한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장 17절)

 

주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사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 각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었다. '주의 자녀'라는 명확한 정체성이 생긴 지금, 그리고 그가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우린 무엇을 해야할까?

자아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해결된 우리에게 그분은 새로운 삶의 목표를 주신다. 바로 '이웃 사랑'. 이웃은 타인이다. 나 자신은 이웃이 될 수 없다. 나에 관한 문제가 해결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안되는 것인가요?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웃 사랑과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이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장 37-38절)

 

첫째되는 계명은 목숨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것이다. 첫번째 계명이 선행되어야지만 두번째 계명이 가능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가장 바탕에는 '너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나에게 하나님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첫째 계명인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를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두번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행할 수 있다.

 

사랑의 전제조건: '타인'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은 '타인'이다. '나'와는 다른 타인. 그것이 하나님이든, 아니면 이웃이든, 어찌되었든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라는 스바냐의 구절에는 '너'라고 하는 타인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사랑하실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는 그러실 수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도 외로움을 느끼셨을까? 그럴수도 있을 것 같다. 그분도 슬퍼하고, 외로워한다. 스바냐의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사랑은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엔 항상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도 어쩌지 못하셨다. 사랑을 받는 것과 하는 것엔 항상 타인이 필요하다. 

 

Q. 왜 점차 대한민국이 불행한 나라가 되어가는 것일까?

점점 더 타인과의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 다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을 바란다. 제발 '나'를 좀 봐주세요, '나'의 고민을 들어주세요... '내'가 너무 힘들어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말한다.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나 자신이 현재 질식해 죽을것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나 자신을 사랑한단 말인가. 이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자아탐구, 자기 사랑... 이러한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질수록 더 많이 고립되어간다. 개인화된 사회에서 사랑은 불가능하다. SNS를 많이 하면 불행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SNS는 '나'를 알리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그러니 너무나 피곤하다.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친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해야한다.

 

Q. 현재 나의 상황도 힘든데, 타인을 사랑할 여력이 없다. 그런데도 왜 '이웃 사랑'을 해야하는 것인가?

앞서 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고 간 '계명'이다. 계명. 이것은 지켜야할 명령이다. 구약시대 때 계명은 어기면 죽음이었다. 이 명령에는 조건이 없다. 나의 상태가 좋든, 나쁘든, 지켜야하는 명령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네 몸과 같이'라는 구절에 집중했다. '네 몸과 같이'라는 말에는 그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반만 사랑한다, 라는 선택지는 없다. 모 아니면, 도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코가 석자이므로 타인을 사랑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타인이 먼저 나를 사랑해준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보자면 '자기애적 사랑'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전제조건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는 것. 이것이 '이웃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여전히 타인을 사랑하기 싫다고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의 자녀'. 주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차별적인 사랑을 했는가? 어떠한 조건을 달았는가? 아니다. 그는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팔아 넘기고 배신한 가룟 유다 또한 사랑하셨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가야바와 안나스 대제사장도 사랑하셨다. 빌라도 총독 또한 사랑하셨다. 자신을 조롱하고 욕하고 채찍질한 그 모든 군중들을 사랑하셨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

 

맞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내 코가 석자인데 이웃사랑을 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인것 같다. 따라서 이웃사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해내셨다. 도대체 어떻게??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분은 해내셨다. 그리고 '주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차별없는 이웃 사랑'을 행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면, 우린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하는것에서 나온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욱 더 고립시키고, 안으로만 파고들게 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버린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연결시켜준다. 왜냐하면 사랑을 주기 위해선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아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에서 자아탐구는 나 스스로의 죄를 마주하게 될 뿐이다. 죄는 마치 늪과 같아서 계속해서 허우적대며 끊임없이 아래로 침잠하게 된다. 기독교는 자아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너무나도 쉽게 해결해버린다. '주의 자녀'라는 명확한 정체성. 

 

따라서 기독교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정체성이 확고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는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준 계명은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타인'에게 향한다. '타인'이야말로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명이다. 나의 현재 상태와 조건에 관계없이 지켜야만 하는 계명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이다. '이웃 사랑'. 이것은 '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는 '당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행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