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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와 기독교

이렁비니 2024. 8. 7. 23:26

기독교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이 질문은 사실, 많은 수의 백인 기독교도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의문점일 것이다. 그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노예 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했다. 그렇다면 진짜 성경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먼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초기 기독교가 어떤 집단에게 인기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퍼지기 시작한 서기 1세기 경, 기독교는 노예들, 가난한 이들에게서 환영받았다.

교회는 인종과 계급을 차별없이 모두를 환영했다. 도시에서 개인은 익명의 존재로 전락하며, 그로 인해 고독감, 외로움을 맛보기 일쑤일 것이다. 따라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안도감을 주었다. 이렇게 친교와 통일을 강조하는 교회는 과부나 고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차별 없이 돌봐주었다.

6명의 사제, 7명의 집사, 7명의 부집사, 42명의 조수, 52명의 악귀 추방인, 독경인, 문지기,
1500명 이상의 과부와 걸인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서기 250년경 로마의 주교가 쓴 글)

 

기독교는 낯선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를 베풀고
죽은 자의 장례를 세심히 치러 줌으로써 특히 발전하고 있다.
- 율리아누스 황제(331 - 363) - 

 

기독교인이었다가 배교한, 최후의 비기독교인 황제인 율리아누스 황제 마저도,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사랑과 봉사 정신을 인정하고 있다.

노예들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졌고, 이는 기독교 복음 전파에 모종의 역할을 하게 된다. 2세기 스페인 노예 목록에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이름이 끼어있는데, 그 중 몇 명은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보다도 먼저, 기독교를 전 세계에서 2번째로 국교로 공인한 국가는 조지아이다. 현재 러시아 남부, 카프카스 산맥 지방에 속해있는 국가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 조지아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이는 노예의 신분이었다.

노예의 신분으로 나라 전체를 국교화한 이들

카파도키아의 성녀 니노

 

 

성녀 니노(AD 296 - 332) - 조지아

성녀 니노(296 - 332)는 원래 카파도키아의 공주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왕실이 황폐화되어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지아로 끌려왔는데, 그녀는 거기서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질병들을 고쳐주었다. 결국 왕비의 불치병까지도 고쳐주게 되었고, 왕은 이에 어떤 보상을 바라는지 물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개종을 바랐다. 왕비는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으나, 미리안 왕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사냥을 하던 중에 자신에 짐승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때에 곳에서 가장 알려진 하나님과 한가지 거래를 하였다. 그가 살아남으려면 개종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짐승들은 물러갔고, 325년에 왕은 조지아 전역에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사제들과 주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성스러운 임무가 시작되고, 포로에서 해방된 니노는 조지아 카케티의 기슭에 있는 보드베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은수자로 여생을 보냈다.

결국 왕과 왕비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조지아는 기독교 국가로 남아있다. 

 

물론 성녀 니노의 이 전설에는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전설에는 그녀가 죽어가는 아이에게 그녀의 두건을 씌워줌으로서 소년을 치료했다고 적혀있다. 물론 이는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고, 실제로는 이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 소년을 살리고, 왕비의 병도 살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술을 행했으므로, 기적이 아닌가?


성녀 니노의 기적이 사실, 그녀의 뛰어난 의학적 지식으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기적의 의미는 퇴색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병이 나았다는 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죽어가는 한 소년을 긍휼히 여겼다는 그 마음이다. 그녀 또한 노예의 신분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의 현재 신분에 집착하여,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 할 수도 있었다. 한 국가의 공주였다가 노예로 추락했으니, 이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낮은 신분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헌신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적을 행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는 노예라는 자신의 현재 상황과 관계 없이, 타인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분의 길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라 전체가 통째로 기독교화된 것이다.

이런 재밌는 사례는 하나 더 있다.


 

성 프루멘티우스 (AD 4세기 - 383년) - 에티오피아 

그는 티레의 그리스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홍해 해안에서 난파당해 악숨 제국(현재의 에티오피아)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황제의 눈에 들어 고위직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에티오피아 대주교가 되고, 군인과 황제에게 성품 성사 세례를 주고 많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전도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현지 언어로 신약을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굉장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노예가 왕을 개종시키다니? 

보통은 그 반대이다. 왕이 노예의 생각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구약의 다니엘서를 보면,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유대인 포로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3년 동안이나 왕실에서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아예 정체성을 바꾸게 하기 위해 다니엘에게 벨드사살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이처럼 왕은 노예들을 철저하게 자신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이름까지 바꾸게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 노예들은 왕들의 그 모든 수고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역으로 왕을 개종시켜버린다.

그리고 아예 나라 전체를 기독교 국교화로 만들어버린다. 조지아, 에티오피아 뿐만이 아니다. 아일랜드도 비슷한 예시가 있다.

 

성 파트라치오(성 패트릭)(390 - 460) -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성 패트릭(390 - 460)이라는 자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된다. 그는 16살 때 아일랜드 해적에게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나간다. 거기서 그는 6년간 노예 생활을 한다. 그 과정에서도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것에서 현지어인 '게일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는 사제가 되어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파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는 서품을 받고자 아일랜드를 탈출, 브리튼으로 갔으며 432년 주교가 되어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파, 아일랜드의 고유 종교였던 켈트 다신교 드루이드 신앙은 거의 사멸하게 된다.

 

이것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던 아일랜드 땅에 제발로 돌아온다니. 그리고 자신이 노예라는 절망적인 신분적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언어를 배워 훗날, 아일랜드에 돌아와 아일랜드 선교에 활용한 것이다.


이들의 사례는 사실 이해할수가 없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기에,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그들은 가장 낮은 신분인 노예로서 이 모든 일들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제도를 옹호했다면 노예들을 통해서 이렇게 한 나라의 왕을 개종하고, 나라 전체가 국교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노예라는 신분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자신이 노예라는 현 상황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며 질문을 다시 살펴보자. '기독교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사실, 성경은 노예 해방에 관해 직접적으로 찬/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노에제도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주제는 노예해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리를 이야기한다. 진리 앞에서 다른 것들은 잠시 뒤로 미뤄진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진리' 앞에서는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내가 노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노예의 신분에 있다 할지라도, 왕을 개종시키는 무지막지한 열정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어야지만 자유를 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조건이 주어졌을 때에 누리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나의 현 상황과 관계없이 누리는 것이 참된 자유이다. 그리고 그 참된 자유는 오로지 진리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

만일 너희가 내 말대로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내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장 31-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