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을 맞아서 교회에서 '감사'를 주제로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듣고, 나눔을 하고난 후, 집으로 가서 어떻게 '감사함'으로 살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매일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다. 예를 들어 감사일기를 쓴다던가, 하루 3가지 감사할 것을 적는 등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무엇일까? 분명 구별되는 특징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감사'와 연관된 가장 유명한 성경의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인 것 같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18절에 있는 '범사에 감사하라'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모든 것에 감사하란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선 그분의 '뜻'이라고 말하신다.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것을 왜 하나님께선 그분의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범사'에 포함되는 것: 고난
'범사'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범사에'라는 단어 안에는 즐거운 일 뿐만 아니라, 힘든 일, 고난 또한 포함될 것이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하는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은,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라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에는 '고난' 가운데 감사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17. 비록 무화과나무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장 17-18절)
하박국 선지자의 경우에는 무화과, 포도, 감람나무열매 등이 소출을 내지 못하고, 흉년이 들고,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다고 했다. 이러한 예시는 '욥기'의 '욥'에서도 나타난다. 욥기 1장에서, 욥은 자신의 종을 통해 자신의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싹 다 죽어버렸단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그 처절한 비극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기 1장 20-21절)
이렇듯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기쁨, 그리고 감사를 잊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그들의 행동은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다. 아마 그들의 행동을 믿지 않는 자들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인간의 신앙심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저렇게까지 고난을 받는데도 감사함을 잊지 않다니!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면 비신자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함을 잃지 않는 그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왜냐하면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유지하는 신자들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심, 즉, '인간'의 의지를 볼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결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원하는 결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강한 의지가 아닌,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고난'을 받아들이는 기독교만의 신기한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 '고난'을 받아들이는 기독교만의 특징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성공회 사제, 신학자인 '존 폴킹혼'은 자신의 저서인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제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가능한 가장 깊은 수준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한 세계가 겪는 고통을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동정심 많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창조주 하나님이 세계의 고통에 동참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세계 바깥에서 고통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품고 있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88p.)
먼저 간단하게 저자와 책에 대해서 설명해보겠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과학 서적과 신학 서적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만 본다면, '과학'이라는 굉장히 객관적인 사실을, '신학'이라는 굉장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편향되어 바라보는 책이 아닌가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쿼크와 같은 양자물리학이나 카오스이론 같은 최신 물리학 이론들과 종교는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먼저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주기 위해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겠다.
다음은 해당 책,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에 적힌 저자 소개를 정리한 내용이다.
존 폴킹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학교에서 수리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에는 왕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이후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 웨스트콧 신학교를 거쳐 82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아 사목 활동을 했다. 이후, 97년도에는 기사 작위(KBE: 대영제국 훈장)를 받고, 2002년에는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기여한 공로로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이정도면 저자에 대한 어느정도 신뢰도가 쌓였을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어떻게 과학 서적과 신학 서적이 함께 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과학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과학철학'을 다루고 있다. 과학과 과학철학은 다르다. 이 책은 '질문들'에 다루고 있지, 과학적인 현상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책에 대해 설명하겠다. 해당 책에선 '고난'의 문제를 다룰 때, 1755년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을 언급한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우리에게 왜 이런 고난이!'
1755년 11월 1일 아침, 포르투갈의 리스본 사람들은 만성절(All Saints Day)를 맞아 교회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오전 9시 40분, 엄청난 대지진이 벌어졌고, 도시 한복판에 5미터 남짓한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이 몰려있던 교회와 시가지는 높은 건물들이 많았기에, 인명피해는 컸고,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건물이 없는 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하여 부둣가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난지 40분 후, 거대한 지진해일이 항구와 도심지를 강타했다. 몇몇 말탄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그 뒤 해일이 두번 더 왔고, 해일이 덥치지 않은 곳에서는 화재가 일어나서 리스본은 5일 밤낮동안 불에 탔다. 얼마나 끔찍했는지,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영국 개신교 성직자 생존자들은 평소 서로를 이단이라 부르며 으르렁댔지만, 이날만큼은 서로 함께 기도하며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신의 천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지진의 피해를 피해간 유일한 지역은 홍등가로 유명했던 '알파마'(Alfama)지역이었다. 교회는 도심에 있었고, 높은 건물들과 많은 사람들은 큰 인명피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만성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밝혀둔 촛불들은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홍등가는 인구밀도가 낮고 높은 건물이 없었기에 큰 피해가 없었고, 교회와 도심을 피하기 위해 외곽에 있어서 2차 피해인 화재와 해일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당시 사람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리스본은 종교적으로 굉장히 신실했던 도시였다. 많은 수의 성직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뿐 아니라, 하필 지진이 일어난 날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 사람들이 몰려있어서 인명피해는 더더욱 커졌다. 이 대지진 사건이후 사람들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이 당시, 이 지진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홀로코스트의 충격에 비견될만 했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괴테, 루소, 볼테르 등등) '전지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회의감을 쏟아내었다.
이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서 폴킹혼은 어떤 신학적 대답을 내놓았을까? 그는 과학자 답게 이성적으로 접근한다. 1755년 일어난 포르투칼 대지진은 '지각을 구성한 판'이 흔들려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이 가혹하지만 진실이다.
이 사건(리스본 대지진)은 자연이 행하는 악의 아주 쓰라린 예입니다. 패러(영국의 오스퍼드의 신학자)의 답은 가혹했으나 진실이었습니다. "지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그 본성을 따라 작용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하나님은 땅이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방식대로 존재하도록 허락하셨듯 말이지요...(중략)
저는 살인 행위나 암의 발생이 하나님이 '의도'한 그분의 뜻이라고는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분은 피조물이 세계에서 자신의 본성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그 허용에는 그러한 일들이 발생할 가능성까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고통과 악은 하나님이 약해서, 하나님이 그러한 고통에 냉담해서, 하나님이 고통을 간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논증에서 모든 고통과 악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이 고유한 존재로 존재하도록,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엄격한 통제만을 따르는 데서 벗어나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치르는 불가피한 대가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고통은 여전히 신비로 남습니다. 어린아이를 둔 엄마가 불치의 병에 걸리는 일이 끔직한 하나님의 형벌,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암이 발생할 가능성 자체가 정말 새 생명의 진화를 위한 불가피한 대가라고 하더라도, 이 상황의 참담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지적인 논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심오한 문제가 남습니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88p.)
폴킹혼의 주장은 정말 과학자답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대지진이 일어난 이유는 지각판의 진동 때문이고, 아이가 죽어가는 이유는 암세포의 발병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한 극히 피상적인 부분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만으로는 풀 수 없는 '고난'에 대한 심오한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기독교가 고난을 바라보는 이 심오한 방식 때문에 폴킹혼은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참 인간의 삶을 사심으로써 우리와 운명을 공유하셨다고 믿습니다.
흥미진진하고도 엄청난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을 가장 쉽고 명백한 언어, 즉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심오하고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중략)
예수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면 십자가에 달린 외로운 인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고통을 받아들이시며 이 세계의 아픔을 끌어안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불행을 겪을 때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어둠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89p.)
마지막으로 책에선 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한 일화를 소개한다.
포로수용소에서 어린 유대인 소년이 게슈타포가 설치한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몸을 비틀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강제로 그 교수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를 보던 유대인 군중 중 한 명이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때 한 사람은 자기 안에서 이런 답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저 교수대에 매달려 계시다."
이런 통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그리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역사적으로 구현되었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의 통찰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90p.)
바로 이 지점,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지점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