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경의 증거?

이렁비니 2024. 4. 21. 00:11

지난 금요일날 회사 감독님과 점심식사를 하다가 이러한 질문이 나왔다. 

"성경은 결국 만들어진 신화가 아닌가? 이것이 역사라는 증거가 있는가?"

아마 굉장히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이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성경의  증거들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들도 기독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의 이름에서 유래한 영어권에서 흔한 이름들이나(Peter = 베드로, John = 요한 등) 영미권에서 쓰이는 'Oh my God'이란 감탄사, 하다못해 길을 걷다가 십자가를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정말 기초적인 지식들은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관심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들은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또한 알고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질문을 하고 싶지 않나, 생각한다.

과연 이 모든 사건이 실제라고 어떻게 믿는가?

 

먼저, 성경의 범위가 너무나도 넓기 때문에, 일단은 성경의 가장 핵심인 4복음서만을 가지고 설명을 해보겠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로 답변을 할 수 있다. 먼저, 첫번째로 가장 일반적인 답변은 '4복음서'가 그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4개의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통해 그의 삶을 다각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성경 자체가 어떻게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번째 방법으로는 동시대에 쓰여진 다른 문헌들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기 1세기경의 유대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서나, 타키투스 등의 기록에서도 '예수'라는 인물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불충분한 증거?

그러나 과연, 이렇게 증명하고, 이성적으로 납득시키는것만이 답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실, 4복음서를 제외한 문서들에 적힌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굉장히 적다. 고고학적 증거들 또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예수가 살던 시기는 이미 2000년 전이고, 그 이후로 수많은 세월이 흐르며 실제 그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 왜 증거가 불충분할 수 밖에 없을까?

 

사람들은 일기를 쓸 때, 자신이 하루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들만 선별해서 쓰곤 한다. 눈 뜬 그 순간부터, 잠드는 그 순간까지,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역사가들도 마찬가지다. 왕의 즉위나, 국가간의 전쟁, 등과 같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사건들 위주로 기록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변방에 일어난, 하찮은 십자가 소동은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너무나도 작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4복음서 외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종교는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종교는 지배계층들이 피지배계층을 억압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나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왔다, 라고 주장해버리면 이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수많은 지배계층들이 절대권력을 누렸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반대로 아래에서부터 위로 전파되었다. 초창기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과부들,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은 자들이 믿었던 종교이다. 그들은 글을 읽고 쓸줄도 몰랐고, 고고학적 증거를 남길만한 유적을 만들 수도 없었으며, 본인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될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이름없는 자였고, 흔적도 없이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무언가를 후대에 남긴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실제로 4복음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은 읽고 쓰고, 율법교육도 받았던 사도 바울이 쓴 것이 대부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안 보이거든.
(어린 왕자 중)

 

어린 왕자의 이 말처럼, 때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글로 쓰여질 수 없다. 오히려 글로 쓰여질 수 없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왜 신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이지 않게 숨겨두었는가, 라고 따질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것을 파헤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퀘스트가 아닐까 싶다.

만약, 모든 것이 다 증명되어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린 할 일이 없어진다. 마치 모든 퀘스트를 다 깨버린 게임처럼, 인생을 살아가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지점은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증명할 방법이 없는가?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기독교 변증론이 발전되었다. 때로는 이런 변증론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납득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합리성 때문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믿고, 이를 자신의 신념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때로는 이성으로 때로는 감정으로, 혹은 때로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로... 그 지점은 하나의 변곡점이기 때문에, 이를 경험한 사람은 인생이 바뀌었다, 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단계까지는 변증법적으로 증명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벽을 마주한다. 머리로는 납득이 되지만, 진짜 가슴으로는 못 느끼는 경우이다. 거기서는 결국 선택과 결단의 순간이 온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꼭 마주해야할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증명될 수 없는 순간이기 때문에 이는 마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불확실성 속에 나의 몸을 던지는 것. 이것이 제대로 된 신앙으로 가는 발걸음을 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