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독교의 신은 왜 인간들을 지옥에 보내는가?

이렁비니 2024. 4. 7. 02:44

기독교인이라면 굉장히 많이 받는, 곤란한 질문이 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사람들을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한 지옥에 빠트리는가?

사실 이 대답은 굉장히 기독교인들을 엄청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사실 우리의 머리로는 너무나도 부조리한 점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실 조금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으로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는 지옥의 이미지?

아마 기독교에서 가장 먼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지옥의 모습은 유황불이 영원히 타오르고, 수많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모습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지옥의 모습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가 쓴 '신곡-지옥편'에 묘사되는 모습이다. 우리가 아는 지옥을 묘사한 수많은 창작물들은 단테가 쓴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참고로 해서 창작된 2차 창작물인 셈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묘사된 지옥의 구조. 아래로 좁아지는 원추형 역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테는 크게 총 9층으로 나뉘어지는 지옥의 세계관을 만들어놓았고, 각 층마다 서로 다른 죄목으로 영원히 고통받는 영혼들을 집어넣었다. 지옥에는 단테가 평소에 싫어했던 사람이나 그의 정치적 라이벌도 있었다. 단테가 살던 13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는 사실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기벨린 당(황제 지지파)와 겔프 당(교황파)간의 오랜 대립이 있었으며, 그 둘은 서로 싸우며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단테 또한 이러한 정치적 혼란 가운데 수많은 피해자가 생겨났고, 단테도 그중 한명이었다. 1302년, 단테는 뇌물 수수, 각종 비리 혐의 등으로 기소되어 유죄 선고를 받고 그는 고향 피렌체를 그리며 망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테가 쓴 '신곡'은 이 망명 시기 동안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옥에는 단테의 정치적 라이벌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많이 묘사가 된다. 그가 평소에 싫어했던 교황들도 지옥에서 심판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교황 니콜라우스 3세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평가를 안좋게 했고, 그들을 지옥의 제8층, 제3원 구역에 집어넣었다. 거기서 그들은 다리만 나온 채, 거꾸로 처박히고 발에 불이 붙은 채 괴로워한다. 그 외에도 지옥의 8층에는 겔프당과 기벨린당 사이를 분열시킨 모스카 라는 인물이 벌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다른 한 망령이 손이 다 잘린 짤막한 양 팔을 허공에 쳐든 채 흘러내리는 피로 
얼굴을 적시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잘 아는 모스카였다. 내가 혀를 차며 쏘아붙였다.
"쯧쯧, 그렇게 피로 목욕을 하더니, 그대가 얻은 거라곤 가문의 비참한 몰락뿐이군."
그러자 모스카는 고통에 싸여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더니 훌쩍 떠나버렸다.
(단테 - '신곡, 지옥편'  제 28곡 중)

19세기 프랑스 판화가 구스타프 도레가 그린 '신곡-지옥편'의 이미지. (좌) 제8층 3원 구역에 발만 나온채 거꾸로 처박힌 교황들의 모습. (우) 제 8층 9원 구역에서 고통받는 영혼들. 가운데에 있는 목잘린 인물은 프랑스 귀족인 베르트람으로 영국 왕 헨리 2세의 신하였으나 장남 헨리 3세가 아버지를 모반하도록 이간질함. 단테와 그의 인도자 베르길리우스가 이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을 여행한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집필한 작가이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의 모습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묘사되는 지옥과 굉장히 닮은 점들이 많다. 예를 들어, 단테가 쓴 '신곡-지옥편'에 따르면 지옥의 초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케론 강을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서의 뱃사공은 '카론'이다. 그런데 카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뱃사공이다. 그 외에도 미노타우르스, 켄타우루스 등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들이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단테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내용과 기독교의 내용을 섞어서 자신이 생각하는 '지옥'의 모습을 창조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흔적
1. 로마의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집필한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단테는 지옥을 여행한다.
2.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그리스-로마 신화 속 지옥의 뱃사공 '카론'의 배를 타야만 한다.
3. 7층 폭력 지옥에는 미노타우루스, 켄타우루스, 하르피아 등의 그리스-로마 신화 속 괴물들이 존재한다.
4. 그 외에도 헬레네, 아킬레우스, 헥토르 등 수많은 트로이 전쟁 속 영웅들이 언급된다.
5. 지옥의 가장 깊은 9층, 루시퍼의 입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 외에도 로마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물려있다.
(따라서 단테는 카이사르를 배신한 죄를 예수를 배반한 죄랑 동등하게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지옥의 모습은 '베르길리우스'가 적은 로마 건국 서사시에 '아이네이스'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아이네이스는 이야기의 중반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지옥을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묘사되는 지옥의 모습 또한 수많은 영혼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영혼들은 자신의 범죄들을 자백하도록 강요당하고 영원히 고통받는다.

저들이 지상에서 저지른 범행들을 자백하도록 강요하니, 저들이 범행을 저지르고도 들키지 않았다고 좋아한 것도 다 소용없는 일이오. 단지 그 처벌을 사후로 연기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즉시 응징하는 티시포네가 채찍을 들고 유죄 선고를 받은 자들에게 덤벼들어 채찍을 휘두르고, 왼손으로는 끔찍한 뱀 떼를 휘두르며 자신의
야만적인 자매들(복수의 여신들)의 무리를 부르지요. 
(아이네이스 제6권, 지옥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원한 지옥의 이미지는 '신곡'을 통해 단테가 창조해낸 지옥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단테 본인은 신곡을 적을 때, 그리스-로마 신화 속 지옥의 모습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질문해볼 수 있다.

'로마 시대 사람들은 죽은 뒤에 있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했을까?'

'제우스와 같은 신은 왜 지옥을 만들어냈는가? 왜 인간들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내버려두는가?'

딱히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 왜냐하면 현재 진지하게 제우스를 종교로 믿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를 살던 평범한 자들은 지옥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앞선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아는 기독교 지옥의 이미지에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요소들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이러한 그리스-로마 신화가 말하는 지옥의 요소들을 걷어내는 작업을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앞서 말한 질문, '왜 사랑의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몇몇 구절에서 지옥에 대한 언급을 한 구절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다룬 구절은 많이 없다. 굳이 따진다면, 마가복음 9장 48-49절, 지옥은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곳이다. 모든 사람이 소금에 절여지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정도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당 구절을 근거로, 사람들은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지옥일 것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중세시대(르네상스 시대까지도)에는 해당 구절에 근거한 지옥의 모습이 너무도 당연한 팩트였다. 그렇다면 그당시를 살던 이들은 과연 해당 질문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는가?'에 대한 질문에 아마 큰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던 세계에서는 자기가 아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당시 일반적인 중세 마을 구조. 평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사는 마을의 영주에 속했고, 영주의 땅을 경작하며 살아갔다.

 

그당시 수많은 평범한 이들은 평생동안 자기 동네를 크게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태어난 동네에서 죽을때까지 소작농으로 살았으며, 내가 평생동안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마을 사람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동네마다 교회가 있었다. 마을 모든 사람들은 교회를 다녔고, 살면서 십자군 원정 등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교도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당시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은 해당 질문에 굳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주변 마을 이웃 사람들은 다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 질문의 전제 조건인, '믿지 않는 자'들을 그들은 볼 기회가 많이 없었을 것이다. 

서기 1500년대의 유럽 지도. 유럽에 살던 이들이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터키, 그리스 지방에 있는 오토만 제국까지 여행해야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평생 거기까지 갈 일이 없었다. 그들은 평생 비신자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우리가 지옥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근본적 이유

하지만 우리는 저 질문을 던진다. 왜 그럴까? 중세, 르네상스를 살던 일반 농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을 볼 기회가 적었다. 때로는 부정부패하거나, 좀 못된 짓을 하더라도 일단 기본적으로 유럽 전역이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멀리, 이슬람 문화권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기까지 여행을 하지 않고, 그냥 자기가 살던 마을을 평생동안 벗어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현재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만큼,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혹은 종교가 없는 이들을 만나기란 훨씬 쉬워졌다. 그러니 때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 가족이 비신자일수도 있다. 이런 경우, 해당 질문은 엄청 중요해진다. 단지 믿지 않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주변 지인들이 죽음 후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상상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린 이 사실을 이것을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앞서 본 단테의 경우, 그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이 누구인가에 따라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인과응보다, 꼴 좋다, 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단테는 팔이 잘린채 영원히 고통받는 모스카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며 쏘아붙일 뿐이다. 그 외에도 향락을 저지른 죄로 인해 무거운 납으로 된 망토를 입는 형벌을 받는 부패한 볼로냐의 향락 수도사들을 향해서 단테는 이렇게 말한다.

"이 수도승 망나니들아! 그대들의 죄는..."

 

단테는 '왜 하나님이 그들을 지옥에 보내는가'에 대해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들이 거기서 죗값을 받고 있구나, 라며 당연히 납득한 것이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면 단테는 그들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는 자들 앞에서 단테는 '수도승 망나니'라며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여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본 구스타프 도레의 판화. 단테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보지만, 그의 표정에는 그 영혼들에 대한 연민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또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정죄한다.


왜 사람들은 지옥과 하나님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단테처럼 생각하면 편하다. 그저, 지옥에서 저들이 영원히 고통받게 내버려두면 되지. 라고 생각하고 치우면 된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기엔 석연찮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가족이, 친구가, 죽은 후에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상상하기 싫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모스카를 바라보는 단테처럼, 혹은 볼로냐의 향락 수도사들을 바라보는 단테처럼 그냥 혀를 몇번 차고는 내가 갈 길을 가면 될 뿐이다. 

 

결국, 우리가 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린 우리의 주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옥에나 떨어져버려라'라고 욕을 실컷하면 된다. 하지만, 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내가 '믿지 않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족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주변 지인이 되었든,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사실, '사랑'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가치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타인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든 말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나의 유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가 된다. 스스로 타인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깊은 구덩이 아래로 홀로 추락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 지옥에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오직 '나'만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웹툰의 제목처럼, '타인은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지옥이다. 마치 아래에 쓰여진 야고보서의 구절과도 같다. 결국 자신의 욕심이 스스로를 지옥과도 같은 상황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시험을 당할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고 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14절)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사람들을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한 지옥에 빠트리는가?'

이 질문은 결국, 내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말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한다. 이는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부분적인 사랑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9-10절)

 

기독교는 부분적인 사랑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단순하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부르짖는 종교가 아니다. 믿는 자는 천국행, 믿지 않는 자는 지옥행, 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만 기독교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는 지옥을 통한 정죄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 그것이 결국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