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과학 & 기독교
과학은 17세기 유럽에서 근대적인 형태로 피어났습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똑똑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똑똑했고, 중국인들도,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도 이보다 훨씬 앞서서 훌륭한 문화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유일하게 17세기 유럽인들만이 근대 과학을 이루어냈다. 도대체 왜? 과거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타 인종보다 더 똑똑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우생학'등의 그릇된 생물학이 발전되기도 했다.
물론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기독교도 여기에 한 몫을 했다고 본다.
이 지점에 대해서 폴킹혼(영국의 신학자, 물리학자)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에 대한 관념에 뒤따르는 4가지 사유]
1. 세계가 질서정연할 것임을 기대함.
why? ) 창조주가 합리적이고 일관된 분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사실이 아니냐고? 순환론적 세계관에서의 창조주는 합리적이고 일관된 분이 아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시바 신'(Shiva)은 파괴의 신이다. 이 신은 죽음과 파괴를 담당하기에 당연히 합리적이지 않은 신이다.
그리고 파괴의 신인 시바와 반대되는 인격의 신, 파르바티(Parvati)도 존재한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된 특성을 지닌 신성한 부부로,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는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시바는 파괴와 재생의 신으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파괴와 창조를 반복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반면, 파르바티는 사랑과 자비, 어머니의 힘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한마디로 창조-- 파괴가 반복되는 순환론적 세계관이다.
파르바티 여신 자체도 같은 신성에 다른 성격과 에너지를 공유하는 파괴의 신, '칼리'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창조주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세계관이다. 왜냐하면 '파괴'는 비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언제 파르바티 여신이 창조할지, 언제 그녀가 칼리 신으로 변모해 다 파괴해버릴지, 변덕스럽다. 하지만 이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꽤나 합리적인 생각이다. 이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생각이다. 아래 중국 역사 인구 그래프를 보자.
순환론적 세계관에서는 이렇듯, 전쟁과 살육의 시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금 창조와 번영의 시기가 오고, 그 시기가 끝나면.. 또다시 파괴의 시기...가 온다. 끝없는 파괴와 창조이다. 살육과 전쟁의 시기는 칼리가 날뛰는 시대, 혹은 시바 신이 날뛰는 시대... 이런 식으로 해석되지 않을까? 힌두교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기에 칼리와 시바 신의 차이까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세계관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운이 나빠서 파괴의 시기에 태어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다. 내세만을 기대할 수 밖에...
2. 창조주는 자유로운 분이시다. -->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어떤 우주든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말은 어떠한 원칙을 한번 정하고 기계처럼 작동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질서'만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단 의미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지점을 놓쳤다고 한다. 그들은 자연의 '질서'를 숙고하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뉴턴의 기계적인 이신론적 세계관에서의 하나님은 '질서'를 만들어놓으면 그걸로 창조를 끝내버리는, 그러한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질서 가운데서도 여전히 자율성을 이끌어내는, 그러한 하나님이시다.
Q.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고통을 만드셨을까???
등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요것은 다른 주제이므로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자.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랑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사랑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3.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연구할 가치가 있다.
-- 중국인들은 이 지점을 놓쳤다. 그들은 인간 세계에 집중하느라 자연 세계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유교 등은 사실상 자연에 큰 관심 없고, 정치 철학에 가깝다고 본다. 인간 사회를 어떻게 꾸려가야하는가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혹은 자연을 '도피처'로 삼았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최고의 가치는 '입신양명'이다. 한편, 도교적 관점에서는 '무위자연'이다. 자연은 그 스스로 자연이고,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 = 원래 그러한 것. 따라서 굳이 자연을 관찰하거나 의문을 가질 일이 없다. 유교 또한 마찬가지로 자연이 아닌 인간사회에 더 관심을 가지기에 자연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자연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것은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우리 인간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만큼, 다른 피조물들을 관찰하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의무였다.
4. 창조 세계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찔러보고 연구해볼 수 있다.
이는 불경한 행위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재밌는 예시. 성 보나파키우스는 717년 게르만인들을 개종시켰다.
그들은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토르의 지성소라 생각하고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보나파키우스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이 지성소로 삼는 나무를 베었다. 게르만인들은 상수리나무를 베었기에 그에게 천벌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토르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벤 나무로 예배당을 지었다.
그는 게르만인들에게 악과 선을 구별하는 일,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기부하는 일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따라서 위 4가지 이유를 근거로 기독교가 근대 과학의 창시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무신론'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특이한 개념이고, '신이 없다'라고 상상하기 시작한 시점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무신론'은 과학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로 인해 발생되는 점들이 많다.
과학이란?
과학은 실험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실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론'에 불과하다. 이 이론이 맞는지 틀린지 검증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실험과 결과값을 관찰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이론'은 틀렸을 수도 있다. 굉장히 중요하고, 오해가 많은 지점이다. 이론은 과학이라고 볼 수 없다. 이론은 실험하고 검증해야하는 이론이다. 과학은 실험하는 것이고, 관측하는 것이다. 어떠한 데이터를 뽑아내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 = 실험과 검증 가능한 영역
이 관점에서 본다면 우주론과 진화생물학은 '이론'에 불과하다. 이것은 실험 불가능한 영역이다. 하나님 또한 실험 불가능한 영역이다.
신명기 6장 16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실험하고 측정가능한 영역이 아니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시험해볼 여러 우주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의 일부만을 알고 있는 이 세계, 이 우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이해를 끌어내야 할 뿐이죠. 진화생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환경에서 생물의 진화 양상이 어떻게 달랐을지를 실험해 보기 위해 역사를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역사와 관련된 과학의 경우, 우리는 제한된, 어떤 면에서는 단편적인 증거들을 활용해 가장 만족할 만한 설명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역사와 관련된 과학 분야들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우주론과 진화생물학은 과학 분야에서 신학과 가장 가까운 사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종교와 과학에 관한 질문들) - 존 폴킹혼
이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진화론은 '이론'이다. 화석이 발견된 것은 '화석이 발견되었다'라는 사실이지, 이것이 진화되었다, 라는 것은 우리가 시간을 되돌려볼 수 있지 않는 이상,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똑같은 실험환경을 만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주론도 마찬가지. 다중우주, 멀티버스 또한 검증 불가능한 영역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말고 다른 우주를 볼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멀티버스, 다중우주론, 진화론, 등을 과학의 영역으로 볼 수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