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파묘' : 장의사 '고영근'에 대해

이렁비니 2024. 2. 27. 22:54

 

영화 '파묘'가 굉장히 많은 이슈를 낳고 있다. 본인도 재밌게 영화를 보았고, 새롭고 독특한 소재의 한국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에 굉장히 많은 영화 리뷰어들이 지금도 해당 영화의 숨은 의미들을 분석하는 영상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번 포스팅의 내용은 일반적인 영화 분석과는 다르게, 장의사 '고영근'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서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장의사 고영근. 그는 어떻게 개신교 장로면서 무속 신앙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을까?

 

장의사  고영근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특히나 장의사 고영근(유해진 배우)에 초점을 맞춰서 글을 적는 이유는, 그가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개신교 장로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무속 신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의열 장의사 내부에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걸려 있다. 그뿐 아니다. 그가 김상덕을 도와 괴물에 맞서 싸울 때엔 전도서 4장 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세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을 외우기도 한다. 해당 구절은 교회에서 '팀워크', 혹은 '결혼의 이점'을 강조할 때 굉장히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아마 감독 또한 비슷한 의미로 해당 구절을 고영근의 대사로 넣었을 것이다.

 

장의사 고영근. 그는 동시에 속물적인 개신교 장로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신도들과 함께 관 앞에서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감독은 영화가 너무 진중해지지 않도록 이러한 지점들을 웃음 포인트로 집어넣었다. 실제로 관객석 여기저기서는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왜 해당 지점이 웃음 포인트였을까?'

타 종교의 배척

고영근이 최민식에게 성경의 구절을 대사로 암송할 때, 혹은 그렇게나 무속 귀신과 싸우고 난 후에 엔딩에서 찬송가를 관 앞에서 부를 때, 관객들은 굉장히 낯선 감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흔히 생각하기에 교회와 무당집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두 요소가 만날 때 우린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해당 장면에서 감독은 이러한 낯선 감정을 영화의 유머 코드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 장로와 무당. 대살굿과 성경공부... 이런 것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둘이 같은 공간 안에 있다? 이것은 아마 서로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개신교 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유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있을 때에도 무당들은 굉장히 많은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만이 답일까? 도대체 어떻게 고영근은 개신교 장로면서 동시에 이런 무속 신앙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을까?

무당의 이미지. 목사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이에 관해서 우린 중요한 개념을 하나 알아야 한다. 바로 '현지화(Localization)'. 사실, 기독교가 다른 문화권에 전파될 때엔 항상 해당 문화권이 원래 가지고 있던 문화와 어느정도 융합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러한 일들은 자연스레 일어나기도 했지만, 선교사들이 그들의 문화권에 선교를 하기 위해 굉장히 체계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마테오 리치' 신부의 예시이다.

 

마테오 리치, '천주'의 개념을 중국인에게 소개하다.

마테오 리치, 그는 16세기 중국에 파견된 이탈리아의 선교사였다. 그에겐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문화가 서구의 문화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강압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면 분명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말엔 이러한 서양 선교사들의 강압적인 포교 정책으로 인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중국인들이 믿는 유교 사상을 연구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그들의 시선에 맞추어 유교 경전을 인용하며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다. 먼저, 그는 유교 경전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이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천(天)'하늘'을 숭배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마테오리치는 중국인들에게 당신들이 믿는 그 '천'이 사실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천'의 개념에 인격신의 의미  '주'(主)를 더하여 새롭게 소개된 개념이 '천주(天主)'이다. '천주', 많이 들어본 말이다. 바로 '천주교(서양으로는 가톨릭)'가 동양에 처음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는 그당시의 관점에서도, 현재의 관점에서도 굉장히 급진적인 관점으로 선교를 한 셈이다. 

이를 통해 마테오 리치는 우리가 가지고 온 '신(하나님)'이 당신들이 원래 믿던 전통적 가치관과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원래 믿던 '유교 사상'에서 부족한 부분을 설명해주며, 완전하게 해주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왔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테오 리치가 한 선교방식은 이단인가? 그는 기독교를 유교의 방식을 통해 설명하고, 선교하고 있다.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그가 쓴 책, '천주실의'.

그가 쓴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유교식으로 정리한 책, '천주실의'는 그당시 중국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그들이 믿는 하늘에 계신 신, '상제(上帝)'와 결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설명한 이 책은 중국의 학자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들도 '하늘에 계신 상제여'라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마테오 리치는 사실 알고 보면 당신들이 믿는 '상제'라는 분이 사실 '하나님'이다, 라고 이 교리서를 통해 설명해준 것이다. 간략하게 소개되는 해당 교리서의 내용은 다음들이다.

  • 유교의 상제(上帝)는 기독교의 하느님(天主)이라고 주장했다.
  • 유교의 기초적 교리를 인정.
  • 하늘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인간의 영혼 불멸성을 강조.
  • 인간의 영혼이 신령스러움을 중국 고전들을 통해 입증.

보다시피, 유교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을 융합하려고 노력한 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마태오 리치는 '천주교'라는 종교를 새롭게 창시한 사람인가? 그는 원래 있던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단'인가? 아니다. 그는 분명 로마 가톨릭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의 전통에 따라 성공적으로 로마 가톨릭을 중국 황제에게까지 소개시키기고 포교활동을 중국 땅 내에서 펼쳤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 유교 사상 을 섞어서 '천주교'를 창시한 것이 아닌가? 라고 여전히 반문할 수도 있다. 이런 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위해 한 인물을 더 소개한다. 사실, 마테오 리치와 비슷한 전략을 쓴 인물이 한명 더 있다.

 

사도 바울.  맞춤형 전도

사도행전 17장에는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한 선교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여러 곳을 떠돌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아덴(아테네)에 도달하게 된다. 아테네에는 수많은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심히 이 도시의 사람들을 관찰했고, 그들이 시장에서나 거리에서나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즐겨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에 있던 외국인들이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일에 시간을 쏟던 사람들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테네의 거리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한 제단을 발견했다. 그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혀있었다. 됐다! 바울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 지점을 이용해서 전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게 됐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2-23절)

 

바울은 뒤이어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우린 한가지 지점에 집중해야 한다.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무엇을 섬기는지 집중해서 관찰했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이 어떤 고민이 있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사상과 철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알지 못하는 신'. 그것이 그들의 철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바울은 그 지점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얼마나 교묘한 전도 수법인가. 아주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배척하거나, 대립 관계를 세우지 않고 그들의 시선에 맞추어 설명해주는 것이다. 사실, 당신들이 믿는 그 신의 온전한 것이 '하나님'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의 시공간만 바꾼다면 마테오 리치의 선교 수법과 동일하다. 서기 1세기에서 서기 16세기로, 아테네에서 중국으로 시공간을 바꾼다면, 그 본질적인 선교 수법은 동일하다. 맞춤형 선교! 마테오 리치의 선교가 19세기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과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상대의 입장에서 선교했다는 점이다. 상대의 가치관에 맞추어서 말이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시선으로 진리를 전파하는 것. 그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인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에서만 이러한 수법을 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이 취한 가장 큰 선교 전략이다. 


히브리서에도 이러한 바울의 맞춤형 전도 방식이 굉장히 잘 드러나 있다. 히브리서의 독자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히브리인들이었다. 히브리인들이 믿는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와 여러모로 대립되는 관계였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유대인들이 믿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는 대치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이 위대한 선지자라고 말하는 모세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기존에 그들이 믿던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넘고 완전케 한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책을 계속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므로 제사장직을 영원히 누리십니다.
(히브리서 8장 23-24절)

 

당신들이 믿던 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대치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제사장직을 완전케 하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아테네에선 아테네인들의 가치관에 맞춰서, 히브리인들에겐 히브리 사람들의 가치관에 맞춰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의 가치관에 맞췄다고 그 복음의 진리가 사라진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오히려 완전하게 해준다. 바울이 오기 전까지 아테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이 어떤 신인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신은 '알지 못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다. 또한 히브리 사람들은 유한한 목숨의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이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복음은 아테네 사람들을, 히브리 사람들을 완전하게 해준다. 이는 16세기, 마테오 리치의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복음의 '현지화'라고 말한다.

 

복음의 '현지화'

우린 기독교가 하나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진리는 하나이다. 진리가 2개다, 라고 말하는 순간, 이것은 이단이 되고, 그것은진리가 아니게 된다. 진리는 간단하다.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구절이라 말할 수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로 진리는 요약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것 외에는 진리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굉장히 많다. 진리는 하나이나, 진리로 향하는 길은 여러가지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할 때 '현지화'가 필요한 것이다. 아테네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아테네인들의 문화에 맞게, 히브리인들에게 전파할 땐 히브리 문화에 맞게 전파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야지 그들은 그들이 가던 길을 갈 수 있고, 마침내 그 길의 종착지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성공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선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인들이 가다가 막힌 길, 그 길을 뚫어주는데 도움을 주었고, 마침내 그들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례한가? 아니다. 사랑은 친절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는 과정 또한 친절해야한다. 상대의 시선에서, 상대의 관점으로 같이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교리에 어긋나는가? 그럴수도 있다. 사실 굉장히 미묘한, 외과 수술과도 같은 작업이다. 까딱하면 그들은 실족하여 다시 자신들이 믿던 신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오히려 믿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이 작업은 굉장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한다. 강제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친절하고,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린다. 이렇게 친절하게, 오래 인내하며 복음의 진리로 인도하는 것, 이것이 '현지화'이다. 필리핀 선교를 갈 때엔 필리핀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 선교를 위해선 이슬람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현지화' 작업이 없으면 선교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너무 멀리 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영화 '파묘'로 돌아가보자.

 

전통 신앙의 흔적: 새벽기도

대한민국은 전통적으로 무속 신앙이 강한 나라이다. 조선 왕조가 들어오며 국가 이데올로기가 된 유교가 무속 신앙, 굿, 무당들을 탄압하긴 했지만, 한반도에 가장 뿌리깊게 내린 신앙이 무속 신앙이다. 솟대, 장승, 서낭당 등을 보면 무속신앙이 얼마나 뿌리깊게 남아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 한국 교회에서 강조하는 여러 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성령체험'. 성령체험은 사실, 무속에서 말하는 '트랜스 상태'와 상태적으로 보면 비슷한 점들이 많다. 무당들이 무아지경에 빠져 칼날 위를 걷는 것, 이러한 상태가 '트랜스 상태'의 한 예시이다. 이번 파묘에서 김고은이 연기한 '대살굿' 또한 필수적으로 무당의 트랜스 상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무아지경의 트랜스 상태를 통해 무당 '화림'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녀는 대살굿을 벌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목표로 이 굿판을 벌였나? 그녀는 성공적으로 묘 이장을 하기 위해 대살굿을 벌였다. 그렇다면 왜 이장을 하는가? 의뢰인 박지용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박지용의 아들을 살리려 하는가? 왜냐하면 의뢰인 박지용이 5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사례비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백미, '대살굿' 장면. 화림은 대살굿을 치른다.

무당 화림이 대살굿을 한 이유를 역추적해보면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원혼의 한을 풀기 위해 대살굿을 한다. --> 왜 원혼의 한을 풀려고 하는가?
  • 성공적인 묘 이장을 위해 ---> 왜 묘 이장을 하려고 하는가?
  • 의뢰인 박지용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 왜 아들을 살리려 하는가?
  • 의뢰인이 거액의 사례비를 주기 때문에.

결국 무당 화림이 해당 굿을 한 이유는 금전적 보상 때문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굿을 하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 왜 굿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그녀는 돈 때문에 굿을 한 것이다.

 

이제 교회의 '새벽기도'를 살펴보자. 새벽기도는 새벽에 깨끗한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한국의 전통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전통을 교회에 접목시켰고, 이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요소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거부감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의 부흥에 큰 기여를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벽기도를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혹은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된 자들이었고, 그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 꾸준히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부분적인 사랑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모성애, 우정, 등등... 이러한 요소들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분적일 뿐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장 9-10절)

 

부분적으로만 사랑을 알던 이들이 온전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었던 정화수 떠놓고 하는 새벽기도를 변형시켜 교회의 새벽기도로 바꾼 것이다. 이둘은 사실 겉모습은 같다. 그러나 본질은 다르다. 기존에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기도에 투영시켰다.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굿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사랑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질문으로, '장의사 고영근은 개신교 장로면서 동시에 무속 신앙일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영화 표면적으로 봤을 때엔 그가 망자들의 재물을 훔치고, 성경공부라는 명목하에 도박판이나 벌이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라고 보인다. 하지만 이 질문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기독교는 무속신앙과 같이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답은 복잡해진다. 배척하거나, 대립하고 싸우는 것.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다. 사랑은 분명 무례하지 않다고 고린도전서 13장에 적혀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들의 시선에 맞춰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먼저 이해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걷다가 막힌 지점, 그 지점 너머에 온전한 진리가 있다고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그들이 스스로 길을 뚫는다. 왜냐하면, 막다른 지점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던 새벽기도가 교회의 새벽기도가 된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는 무속신앙과 갈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뿌리깊은 전통까지 다 없애버린다면, 오히려 복음은 전달되기 힘들다. 그들이 막힌 곳 너머에 완전한 사랑, 완전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한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들로 포스팅을 마치겠다. 전 세계에는 각자만의 고유 문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 문화의 토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내었다. 그들은 이단인가? 그들이 온전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한,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리는 하나다. 하지만 진리로 향하는 길은 여러갈래가 있다. 

(좌) 50년대 중국에서 그려진 예수의 그림. (우) 우리나라의 운보 김기창이 그린 '예루살렘 입성'

자료조사를 하며 알게 된 운보 김기창의 예수일대기 연작이 굉장히 재밌었다. 특히 제목은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해놓고 뻔뻔하게 한양 도성의 문을 그려넣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