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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닭강정':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을까? (약 스포)

이렁비니 2024. 3. 24. 10:36

이병헌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닭강정'에는 기계를 연구하는 '유인원 박사'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닭강정 9화에서 그는 기계의 원래 주인인 외계인 4명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외계인은 스스로 외계인이라고 주장만 할 뿐, 외형도 인간하고 똑같고, 딱히 어떠한 능력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들 스스로는 인간들 이상의 능력을 행하면 자기 행성의 법으로 처벌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신하는 '유인원 박사'는 계속해서 외계인이라면 외계인임을 증명해보라고 말한다.

그들이 외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유인원 박사

외형도 똑같고, 능력도 인간하고 똑같기에 그들은 분명 외계인이지만 스스로 외계인임을 증명할 수 없다.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그런데 유인원 박사의 캐릭터가 더욱 모순이 되는 이유는, 그는 분명 저 '기계'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저 기계의 주인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 기계의 주인이 기계를 찾으러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 기계의 주인이 오자, 유인원 박사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당신들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보라며 말이다.

유인원 박사는 '기계'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정작 찾아온 기계의 주인은 초라한 닭강정집 사장 4명이다.

스스로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닭강정집 사장 4명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했기에 아마 유인원 박사는 이 기계의 주인이 아니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인원 박사는 저 기계의 주인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초록색 외계인의 모습? 아니면 어떠한 빛을 내는 영적인 존재? 혹은 포탈문을 타고 나오는 인공지능? 드라마는 장르가 '코미디'라서 이 지점을 유쾌한 웃음 포인트로 잡아내었지만 이것은 사실 엄청 어려운 문제이다. 어떠한 신적인 존재가 스스로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사람은 미치광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 4명의 외계인 중 한명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난 후에, 비로소 '유인원' 박사는 그들을 외계인이자 기계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한다.

결국 '공중부양'이라는 능력을 선보이는 외계인

참다못한 외계인은 결국 유인원 박사를 공중에 띄운다. 결국 그제야 '유인원' 박사는 그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셨다."

사실 외계인은 인간에게 자신들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한번에 처음부터 제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을 드러내며 인간에게 자신이 외계인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유인원' 박사의 반응은 달라진다. 갑자기 깃발을 가지고 오며 광신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갑자기 깃발을 들고 와서 외계인들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외치거나,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그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은 어떠한 신적인 능력을 마주하게 된다면 해당 대상을 '숭배'하게 된다. 숭배의 행위에는 기본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가 존재한다. 숭배를 하는 대상이 을이고, 숭배를 받는 대상은 갑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자발적으로 '을'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유인원 박사가 깃발을 들고 외계인들이 '우리의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해당 과정은 장르가 코미디인만큼 굉장히 가볍게, 그리고 유인원 박사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졌다. 하지만 이 지점은 조금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이란 존재가 피조물에게 어떻게 스스로 '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사실, '신'은 피조물에게 스스로 '신'임을 증명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곰곰히 따져보면 '신'에게 '당신이 신임을 증명해보라'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어딜 감히,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어딜 감히'라고 따져 묻기도 전에 이미 죽어버린다. 애초에 피조물과 '신'의 간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은 위험하다. 우리의 인식 범위 넘어에 존재하고,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의  구약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야훼'라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었고, '야훼'가 머물고 있다는 '성전'의 가장 깊숙한 '지성소'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함부로 거기에 들어갔다가는 목숨을 잃게 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 아론에게 '성막의 휘장 안쪽 법궤 위의 속죄의 자리 앞에 아무 때나 들어가지 마라'고 말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죽을 것이다. 이는 내가 속죄의 자리 위에 구름 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레위기 16장 2절)

여기서 성막의 가장 안쪽 '속죄의 자리'는 지성소인데, 여기는 여호와가 임재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신'이 머무르는 장소였고, 여기는 아무도 못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1년에 단 한번, 정해진 날에 오직 대제사장 한명만이 지성소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차저차해서 '신'이 그가 만든 피조물에게 스스로 '신'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피조물이 '자유의지', 즉, 해당 대상이 '신'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믿고는 피조물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전제를 깔고 들어가보자. 그리고 피조물이 신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2가지 전제가 없다면 애초에 이 상황은 성립이 안된다. 그렇기에 전제를 몇가지 깔아두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런 가정을 한다면 2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 같다. 

 

1) 어떠한 초월적 '능력'을 보여서 스스로 '신'임을 보여주는 경우

이 경우에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보여줌으로서 '나는 인간과 다른 존재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선 드라마 '외계인'에서 외계인들이 신은 아니지만, 그들이 외계인임을 증명한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공중부양이라는 초능력을 직접 보여줌으로서 유인원 박사는 그들이 외계인임을 믿게 되었다. 한마디로 어떠한 초월적 능력은 내가 '신'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사실 이 방법은 '구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겹도록 쓴 수법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킬 때, 홍해를 가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능력을 보는 순간, 인간은 '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어떠한 초월적 존재, 감히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그러한 존재로, 간극을 벌리기 시작한다. 굉장히 모순적이지 않은가. 신을 증명하는 순간, 인간은 신과의 간극을 스스로 벌려버린다. 마치 '유인원' 박사가 외계인의 초능력을 본 이후로 '우리의 주인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보여주는 순간, 신-인간 간의 간격이 생겨나고, 인간은 스스로 '을'의 위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작용은, 인간은 능력을 보고난 후에도 여전히 불순종한다는 점이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무사히 빼내오신 야훼의 엄청난 능력을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했고 결국 그에 대한 댓가로 40년간을 광야에서 헤메야만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닭강정'에서 유인원 박사의 사촌인 유태만은 그들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공중부양 초능력으로 혼쭐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닭강정으로 변한 '민아'를 흉기로 위협하며 기계 작동법을 알려달라고 협박한다.

외계인의 초능력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유태만은 더더욱 폭력을 택한다.

그는 외계인에게 외친다. "야 외계인? 사람 막 날리더니만 왜 그러고 있어? 다시 해봐! 하라니깐!" 오히려 한번 더 그 능력을 보여달라며 화를 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는 모두가 손해를 보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만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에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상대가 외계인임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지위를 내려놓고, 나의 무능력함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피우는 것. 구약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교만'이다. '교만'은 이렇게 순종으로 나아가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광야생활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딱 이렇게 행동했고, 신명기에는 이를 '목이 곧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은 목이 곧은 사람들이 되지 말라.
(신명기 10장 16절)

 

마치 황소처럼 목이 뻣뻣하게 곧았기 때문에 자신의 고집대로, 내가 나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나의 길을 내가 개척해나간다는 것은 멋있어보일 수 있지만, 신의 입장에서 이를 바라보면 이는 '교만'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닭강정'의 유태만처럼 말이다.

이렇듯 어떠한 초월적 '능력'을 보여줌으로서 신이 스스로를 피조물에게 증명할 때에는 여러 부작용이 생기고 만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두번째 방법은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2) 초월적 능력을 보지 않고서도, '신'임을 믿는 경우

능력을 보여주는 순간, 인간들은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신이 원한 것이 숭배받는 것이었을까? 성경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인간들로부터 숭배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랑'을 받고 싶으셨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장 17절 : 개역개정 버젼)

 

구약의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가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고도 말한다. 또한 그냥 기쁜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도 적혀있다.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라는 구절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초월적 존재이자 우주를 만드신 여호와가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것은 딴 차원의 이야기같다. 나 스스로도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본적이 없지 않은가.

 

일단 어쨌든 믿기지는 않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하고, 계속해서 전개해보자.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사랑 또한 받고자 한다면, 신은 숭배의 대상이 되면 안된다.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들에게 두렵기만 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인간들을 잠잠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더 문제점이 있는데, 인간들은 교만하고 목이 곧아서 신의 초월적 능력을 보고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면 성경은 구약에서 끝나야만 했다. 굳이 신약까지 성경이 이어질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초월적 능력을 보여주고 안보여주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초월적 능력을 보고난 후에도 여전히 안 믿을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고, 만약 그 능력을 보고 믿는다 할지라도 이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위해선, 신을 사랑해야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이 그 능력을 보이는 순간, 신은 피조물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기 때문에,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딱 하나. 능력을 보지 않고서도 먼저 믿는 것이다.

카라바조(1571-1610)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 도마는 직접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에 손을 집어넣어보고 난 후,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12사도중 한명인 도마는 자신의 두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직접 그 찔린 옆구리에 넣어 보고서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우긴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도마에게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한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 (요한복음 20장 27절) 그리고 뒤이어 예수 그리스도는 의심이 많은 제자 도마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사도 도마처럼 직접 여러가지 눈에 보이는 증거를 보고 난 후에 신의 존재를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사랑은 확실한 능력을 보지 않고도 먼저 믿는 것이다. 사랑은 끝까지 믿어준다. 때론 흔들릴지라도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을 때, 우린 하나님과 더욱 끈끈한 관계안에 거할 수 있다. 게다가 본다고 해서 다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외계인의 능력을 봤음에도 여전히 그들에게 협박하고 위협을 가하는 유태만처럼 말이다. 

기독교인은 사실 별거 없다. 일반인들과 똑같다. 하지만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때로는 불완전할지라도, 어찌되었든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명확한 표징(sign)을 보여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믿는 것이다. 

나는 모태신앙이 아니다. 20살 때부터 하나님을 조금씩 믿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초현실적인 경험이나 환상을 본적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는 성경 구절을 내가 신뢰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서울 상공에 기이한 빛과 함께 한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