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지옥] 시즌 2가 공개된다고 한다.
보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지옥] 시즌 1의 줄거리에 대해서 검색해보았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사후세계, 종교와 신앙, 교리 등등에 관해 많은 것들을 다루고 있어서, 한번 블로그에도 다뤄보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시즌 1에서의 변수, 튼튼이
[지옥] 시즌 1에서 가장 큰 변수는 '튼튼이'라는 신생아였다. 시즌 1, 4화에서 이제 막 태어나서 아무런 죄를 지었을리 없는, 송소현의 갓난아기인 '튼튼이'에게 갑자기 초월적 존재가 나타나, "3일 뒤 너는 지옥에 간다"라고 말한 것이다.
새진리회의 교주로 군림하던 '정진수'의 교리에 따르면, 고지(지옥에 간다고 예견받는 행위)를 받는 자들은 지옥에 갈 만한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고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고지를 받을 만한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은 '권선징악'을 고지를 통해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갓난아기에 불과한 '튼튼이'가 고지를 받은 것은 정진수의 교리에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죄없는 갓 태어난 갓난아기도 지옥에 보낸다면 신이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들을 지옥에 보내는가? 이 부조리한 상황은 알려지게 되면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아이를 사람들로부터 숨겨야만 했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
시즌 1의 마지막 화, 고지를 받기로 예견된 '3일'이 지나고, 드디어 튼튼이 앞에 지옥에서 온 사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튼튼이의 두 부모가 자신을 고무호스로 묶어서 튼튼이를 감싸안고, 그 두 부모의 신체를 박살내지 않는 이상, 튼튼이를 공격할 방법이 사라진, 사자들은 그 상태로 '시연'(지옥에 보내는 행위)를 시작한다.
강력한 빛이 나타나고, 새까맣게 탄 시체만이 남았다. 하지만, 두 부모와 함께 죽은 줄만 알았던 아기, '튼튼이'는 살아남았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사실을 못 받아들인 동욱은 원래 계획대로 튼튼이를 죽이려 하지만, 그 역시 시연(사이비 단체, 화살촉의 수장) 시간이 다가와 죽고 만다. 새진리회의 사제는 "신의 원칙도 무시한 자들!"이라면서, 길길이 날뛴다. 혜진은 튼튼이를 안고, 택시를 타고 현장을 빠져나간다. 택시 기사는 혜진에게 말한다.
"나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여기는 인간의 세상이니 인간 세상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해야 한다"
[지옥]에서 감독은 마지막 택시 기사의 입을 빌려, 부조리한 신에 대해 자신은 납득이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여기는 인간들의 세상이지, 신들의 세상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튼튼이'와 비슷한 운명을 가졌던, 해리포터
굉장히 신기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나는 해리포터와 '튼튼이'가 스토리상 굉장히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해리포터는 어렸을 적, 볼드모트의 죽음의 저주, 아바다카다브라를 맞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이다.
볼드모트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굉장히 공포스러운 존재였고, 마법사의 돌 시점에선 11년동안이나 마법사 세계에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죽음을 먹는 자들'이라고 불리었고, 볼드모트와 그 세력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볼드모트가 갓난아기에게 치명타를 당한 것이다. 도대체 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고지를 받았던 '튼튼이'가 시연에서 살아남은 것과 비슷하다. 해리포터의 세계관에서 '아바다카다브라'의 주문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지옥] 세계관에서도 '고지'를 받고, '시연'이라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부모의 희생적 사랑으로 그 피할 수 없는 저주를 피했다는 것이다.
해리포터는 그의 부모님(제임스 포터, 릴리 포터)의 희생적 사랑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운명을 피했다.
'튼튼이'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님(배영재, 송소현)의 희생적 사랑으로 시연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운명을 피했다.
해리포터 | 튼튼이 ([지옥] 시즌 1) | |
당사자를 죽이려 한 자 | 볼드모트 | 지옥에서 온 사자들 |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운명을 마주했나? | yes | yes |
죽음을 피했나? | yes | yes |
어떻게? | 제임스 포터와 릴리 포터(부모)의 희생으로 | 배영재, 송소현(부모)의 희생으로 |
여기까지는 해리포터와 튼튼이의 경우가 같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여기서부터이다.
기쁜 소식이 되는 해리포터. 그러나 무관심으로 일축하는 택시 기사.
해리포터가 볼드모트의 저주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마법사 세계에서 희망을 주었다. 그래서 머글 세계에서 살던 때에도 갑자기 이상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자기에게 반갑다며 격하게 악수를 하고 가는 등의 일을 겪기도 했다. 또한, 해리가 살아남았다는 점은 마법사들을 넘어 도비 같은 집요정들에게도 희망이 되었던 듯하다.
반면에 '지옥'에서 튼튼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즌 1의 마지막, 택시기사에게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는 그저 말한다.
"나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란 겁니다."
튼튼이가 시연에서 살아남은 예외적 상황이 되었다는 점은 희망이다. 해리포터가 아바다카다브라에서 살아남은 사실이 마법사들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은 죽음을 승리한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리 : '악'의 문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납득하기 어려워서 과거 가톨릭에서는 튼튼이와 같은 어린아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에 지옥도 천국도 아닌, '연옥'이란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디인가? 흔히 생각하기에 지옥이란 이미지는 불구덩이, 용암, 고통받는 곳. 등으로 연상되기 쉽다.
그래서인가, [지옥]에서도 시연당한 자들의 시체를 살펴보면 까맣게 타버린채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옥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지옥에 대해,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 큰 오해를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선'은 '악'과 대립하는 관계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악'에 대한 개념은 이것이 아니다. 욥기에서 사탄은 욥에게 고난을 줄 때, 하나님께 허락을 맡고 욥에게 고난을 준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욥기 1장 12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선이신 하나님이 사탄에게 네 뜻대로 하라고 허락하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하신 하나님'은 틀린 말이 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면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일단 지금은 '선 vs 악'이란 대립적 관계라는 사고방식은 틀렸다는 점에 집중하자.
그렇다면, '악'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악'의 개념은 '선의 부재'가 악이라는 것이다. 선과 악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고전 기독교 신학은 악은 선의 결핍과 부재로 본다. 이것에 대해서 영미권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본질이나 본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순전히 하느님이 창조한 현실에 기생하는 부패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악은 존재론적 가치가 없는 환상, 혹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지옥'이란?
전통적으로 정교회에서 '지옥'은 자초하는 것, 즉 자유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영혼의 상태로 정의했다. 그냥 단순하게 지구 깊숙한 동굴에 용암과 불이 펼쳐지는 아수라장이 지옥이 아니란 점이다. 이러한 상태에 놓은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맞서 자기 자신을 봉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외부의 징벌로 경험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사랑'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사랑'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지옥] 시즌 1에서 마지막, 튼튼이가 시연에서 살아남는 배경은 다분히 기독교적 세계관이 담겨져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이 죽음을 승리했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희망이자,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 마치, 해리포터가 죽음의 저주로부터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마법사들과 집요정들은 해리포터가 살아남은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지옥]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눈앞에서 '사랑이 죽음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른다. 도대체 신이 원하는 것이 뭐냐고, 메시지가 너무 복잡해져버린다며 화를 낸다. 그리고 튼튼이를 죽이려 한다. 혹은 오히려 이것은 더 끔찍한 종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이비 교주만이 말하는 말은 아니다.
튼튼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신이 아무런 원칙이 없다고, 따라서 더 많은 죄인들이 날뛸 것이라고 주장하는 새진리회.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자들은 어떤가? 이것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였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마지막 택시기사의 대사에서 알수 있다.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 그러니 신은 개입하지 말고 알아서 해라.'
택시기사의 정체는?
감독은 택시기사를 어떤 의미로 극 중에 등장시켰을까? 그는 인간세상에는 무관심한, 신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살아남은 튼튼이를 안고 도망쳐나온 민혜진에게 신의 부재를 말한다. 앞서 말했듯, 악은 선의 부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혜진이 가장 취약하고 혼란스러운 순간, 신의 부재를 말하는 택시기사야말로 악마이다.
택시 기사는 신의 부조리 앞에서 신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신과의 단절을 말한다. 따라서 민혜진은 택시기사로 하여금 스스로 지옥을 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그 곳이 불구덩이라서가 아니라, 그 곳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없어서이다. 반대로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지옥을 단순히 육체적 고문을 받는 형벌적 공간으로 묘사한다면 선과 악은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따진다면 과거 순교당한 자들은 당한 모진 고문들은 지옥의 형벌인가?
[지옥]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지옥'을 육체적 고통을 받는 형벌적 공간이라고 설명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들의 순교는 설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는 '자신은 차마 예수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수 없다'라며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죽었다. 베드로의 십자가형이 육체적 고난으로만 따졌을 때, 지옥에서 겪는 고난보다 덜 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는 성 바르톨로메의 입상이 있다. 그는 기독교 탄압 시기에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두오모 성당에 새겨진 그의 조각상은 기괴하기 그지없다. 그는 피부가 벗겨진채로, 자신의 살가죽을 망토처럼 어깨에 둘러메고 있다.
성 바르톨로메의 모습은 악마의 모습과도 같다. 그의 모습에 근육질 덩치를 조금 더 키우면 드라마[지옥]에서 나온 지옥에서 온 사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악한 존재인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드라마[지옥]에서 나온 신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 이를 교리적으로 하나하나 파고들어가다보면, 다시 논점이 흐려진다.
논점은 무엇이냐면, [지옥]에서 등장인물들은 스스로 신의 부재를 택했다는 점이다. '신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옥'을 스스로 택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신이 부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장 16절)
믿기지가 않는다고? 맞다. 원래 이 사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은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는지,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했는지 분명한 입장을 내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반은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인간처럼 악랄한 동물의 지성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혜롭고 거룩하기에 이를 하찮은 생각이나 단순한 환상으로 여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튼튼이가 시연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은 분명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인 '죽음에서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이미지이다. 튼튼이가 예수라는 의미가 아니다. 튼튼이가 살아남은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죽음을 승리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죽은지 3일 후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이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하지만, [지옥]에서 그들은 이 사실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그냥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다. 그리고 여전히 말한다.
'진리가 어디 있느냐', '공포가 인류를 구원한다'라고. 그들은 엄청 중요한 것을 눈앞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다.
신의 부조리함.
[지옥]에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는 '정의'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는 시점은 죄 없는 갓난아기가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은 시점부터이다. 이전까지는 신의 의도가 이해가 되었다. 비록, 지옥에서 온 사자들의 정체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죄를 저지른 자들을 심판하는 심판자라고 이해하면 신의 의도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갓난아기를 지옥에 보낸다? 이것은 너무나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신의 행동이다.
드라마 [지옥]에서는 이것을 보고, 신이 마치 제멋대로 주사위놀이를 해서 랜덤하고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는 것처럼 묘사한다.
갓난아기마저 지옥에 가야한다면,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 따라서 이런 신은 악하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옥] 시즌1에서 사랑이란 메시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감독 자체가 사랑을 드라마의 메시지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해불가능한, 그래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는 요소이다. 예상 관측 데이터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오류이고, 민혜진은 튼튼이가 살아남은 것이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튼튼이를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이것은 유야무야 넘어갈만한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해리포터의 경우처럼, 사랑은 제대로 된 믿음과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바로 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랑은 그저 이해불가능하고, 부조리한 일로 다가온다. 때론 공포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한번은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이것에 대해서 영국의 신학자, 폴킹혼은 자신의 저서,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에서 존 레슬리라는 캐나다의 철학자가 언급한 예시를 든다.
당신은 곧 사형을 당할 사형수이다. 눈을 가린채, 말뚝에 묶여 있다. 그리고 10명의 사수가 당신을 겨누고, 발포 명령을 내리고 사격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당신은 살아있다. 어찌된 일일까? 그저 어깨를 으쓱하군, “흠, 이렇게 됐네. 하마터면 맞을 뻔 했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당신이 죽지 않았는지 알고자 할 것이다. 여기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연히 모든 사수가 빗맞혔을 경우. 나머지 하나는 당신의 인식 범위 이상의 무언가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 사수가 사실 당신편이라던가…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바로 이 무언가 벌어졌을 일, '당신의 인식 범위 이상의 무언가가 벌어졌을 가능성'. 이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지만, 넷플릭스 [지옥]을 보고 나온 이에게 이것을 설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죄없는 어린아이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은 천국과의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부재한 공간. 따라서 이 부조리함을 못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는 것은, 스스로 지옥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그래도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한 영혼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면, 마지막으로 포도원의 비유를 들고자 한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 가운데서도 악을 보는 사람들: 포도원 일꾼 비유
마태복음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로,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한다.
굉장히 유명한 포도원 품꾼 비유이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3시에, 6시에, 9시에, 11시에 포도 수확을 도와줄 품꾼들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는 이른 아침부터 노동을 한 품꾼도, 마지막 11시에 노동을 시작한 품꾼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다. 그런데 이를 보고 이른 아침부터 온 집 주인이 주인을 원망하며 말한다.
"저자는 한 시간밖에 일했고, 나는 하루 종일 힘들게 일했는데,
저들과 나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다뇨! 이것은 불공평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말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너를 부를 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했고,
나는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었다. 너는 너의 몫을 가지고 가라."
그리고 덧붙인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20장 15 - 16절)
마태복음 20장 15절은 다시 해석하면, "너는 나의 선함 가운데서도 악함만을 보느냐." 이다.
이것은 부조리하다. 아침부터 와서 일한 일꾼의 정의에 따르면 그가 받는 품삯은 나중에 온 일꾼의 품삯보다 많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1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을 했고, 그 또한 승낙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마태복음 20장 2절))
하지만, 그는 나중에 온 자 또한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이다. 불평을 넘어서, 그 일꾼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 가운데서도 악함만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부조리한,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함 가운데서도 악함밖에 보지못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을 보여준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어떤 사건을 완전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 그 사건 자체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감독'이 해당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전달된다.
영화의 플롯, 등장인물, 구성요소, 사건들은 어느 것 하나 감독의 시선과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빼놓고 일어나는 일이 없다.
드라마 [지옥]에서는 튼튼이의 생존이 어떠한 '변수' 정도로 취급된다. 튼튼이의 생존이 '지옥'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 주지만, 이것이 기쁜 소식으로 발전될수 있을까? 그렇게 긍정적으로 [지옥]의 인물들은 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해리포터]에서 해리포터의 생존은 단순한 '변수'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볼드모트로 상징되는 '죽음'을 승리한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은 마법사 세계에서 널리널리 퍼졌고, 희망과 소망을 주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절대 공포스러운 변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해리는 결국 볼드모트에게서 승리한다. 이것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다.
물론, 해리포터는 판타지이다. 하지만, 작가의 메시지와 기독교의 메시지와 어느정도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해리포터를 쓴 작가 본인도 해리포터를 집필한 당시에도 스코틀랜드 교회 신자였다고 한다. 분명 그녀의 신앙관이 작품의 세계관과 메시지에도 묻어나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지옥]에서, 지옥에서 온 사자들,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시연'은 뒤로 갈수록 사건이 되지 못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이들은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대립하는 '사람'들이다. 넷플릭스 시즌2에서는 그 대립이 더욱 심해질 것처럼 비춰진다.
예고편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듯, 다음과 같은 멘트를 말한다. "지옥이 만연한 세상에서"
드라마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지옥이 만연한 세상'. 당연히 지옥에 있으면 지옥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천국을 상상해내지 못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들 스스로 지옥에 있길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본다. 이 말은 그들 스스로, 우리 자신에겐 선의 부재만이 있을 뿐, 즉, 악함만이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는 단테의 '신곡'에서 많이 아이디어를 차용했다고 한다.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단테는 각각,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신곡'을 썼다. 그리고 그중, 명작이라고 일컫고, 가장 유명한 책은 '천국편'이 아닌, '지옥편'이다.
왜 그럴까? 이를 두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현실이 지옥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옥편의 묘사는 굉장히 구체적이고, 머리에 촥 들어오는데, 연옥과 천국편의 묘사는 뭔가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이유가 바로, '현실 = 지옥'이라는 것이다.
'지옥'에 관한 상상은 굉장히 구체적일 수 있다. 다양한 고문 도구와 형벌을 통해서 다양한 종류의 지옥을 반들거나, 지옥에서도 죄질의 정도에 따라 층을 구별하는 등, 이런 것들은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천국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야말로 막연하다. 천국은 단순히, 구름위에 떠 있는 황금으로 되어있는 화려한 성일까? 혹은 푸른 초장이 만연하고 평화로운 곳일까? 하지만,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한 권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반복하는' 불쌍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국을 '하나님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생각하기 쉽다. 굉장히 신기하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 곳이 천국이라니. 그곳이 어디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 예수님이 있다는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 이 생각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서 이반이 말한대로, 인간처럼 악랄한 동물의 지성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혜롭고 거룩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즉,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우린 그분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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