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한국은 기독교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나라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를 파송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믿기 시작하기도 했고, 평양 대부흥 등과 같은 운동 또한 전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유래없는 사건이었다.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3.1 운동 또한 독립역사상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순수하다. 순수하면서도 감정적이다. 따라서, 한번 감응(感應: 무엇에 접촉하여 마음이 따라 움직이는 것)이 된다면, 물불 안가리고 뛰어든다. 이때의 에너지는 거의 폭주기관차 수준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아도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소설 '파친코'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기독교와 재일교포의 역사를 다룬다. 부산에 살던 주인공 선자는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고, 버려진다.
버려진 선자를 목사인 이삭이 아내로 맞이한다. 다음은 선자와 이삭의 대화 내용이다.
"물어볼 게 있어요."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이삭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선자 씨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겁니다.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거에요.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오늘 아침, 선자는 백 목사가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버지는 귀신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자신 곁에 함께하는 것만 같았다.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산소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를 보다 더 잘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많은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삭의 하나님이 백이삭에게 그토록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했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 그랄 수 있어예."
[파친코 1권, 125p]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을 거둬준 이삭에게 마음이 동한 것이다. 즉, 감응된 것이다. 서양인의 시선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는가??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감정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것, '감응'을 동양 미학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마음과 감정의 움직임. 천지가 감응하면 만물이 생동하여 ‘봄’이 온다.
인간이 감응한다면 상(象)이 된다.
서로 느낀다는 것은 ‘뜻’이 통한다는 점이다. 이 감응이 점점 확장된다면 백성들에게까지, 천지만물에게까지 확장된다. 이 감흥을 확장하는 법은 언행을 통해서이다.
‘감’이 있다면 반드시 ‘응’(응답)이 있기 마련이다. 한번 나간다면 한번 들어와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반드시 감응이 확장되고 더 나아가 천하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서구인의 기준에서 '꽃'을 바라보면, 세분화시킨다. 꽃은 꽃잎, 수술, 암술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식으로 분석한다.
한편, 한국인들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 희노애락. 꽃을 보면 꽃이랑 뜻이 통하게 된다. 따라서 '기쁨'이라는 감정으로 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선자는 이삭의 선한 행동에 마음이 감응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삭은 '하나님을 믿어보지 않을래요?'라고 말했고, 선자는 마음이 감응되었기에 이삭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해되지는 않지만, 믿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서양인들은 이해하기 굉장히 힘든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에서 취급하는 '예술'은 어떤 것일까?
동양예술은 '마음'을 그리는 예술이다.
아래의 그림은 이정의 [풍죽도]이다. 이것을 서양의 정물화로 해석하면 안된다.
차가운 북서풍에 맞서는 군자의 기개를 대나무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 이는 뒤에 희미하게 농담으로 그려진, 바람에 휘어진 소인배 대나무랑 대조된다. 또한, 어몽룡의 [월매도]. 이것은 보름달까지 올곶게 뻗어간 오래된 매화 잔가지. 올바른 길을 추구하는 군자의 올곶은 삶을 매화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저러한 것들은 유교적으로 해석되어왔다. 예를 들어, 바람에 굴하지 않는 '풍죽도'의 대나무는 바람직한 '선비'의 상이다. 그 어떠한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히 지조를 지키는 선비의 삶. 이것은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랑은 조금 다르다.
어몽룡의 '월매도'에서 보름달까지 올라간 올곶은 가지 또한 군자를 향한 지조있는 신하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지조있게 추구하는 강인한 민족이 된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만의 강인한 면모이다. 한번 믿었다 하면, 굉장히 단단한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말 신기하고 강인한 민족이다.
그러나... 문제점.
하지만 문제점이 있다. 이들의 순수한 믿음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돌이키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따라서 사이비에 한번 빠진 사람을 꺼내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정말로 지조있게 사이비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목사가 한번 삐끗하면 밑의 성도들이 다 삐끗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처음 그 '감응'이 온 대상을 끝까지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한국인에게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행위는 정말로 익숙치 않은 행위이다.
선자는 이삭과의 결혼에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조건을 내거는 것 외에는 이삭이 선자의 헌신을 시험해볼 방법이 달리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보일 수 있을까?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선자는 결코 이삭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삭을 잘 보필하는 것이었다.
[파친코 1권, 126p]
선자에게 정말로 다행인 점은 이삭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삭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선자는 정말로 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자는 이삭을 만나기 전, 한수라는 남자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한수의 아기를 임신했는데, 한수는 사실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저 얼라를 가졌어예."
한수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네, 그런 것 같아예."
"그렇구나."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선자도 두 사람이 함께 맺은 결실을 자랑스러워하며 빙긋 따라 웃었다.
"선자야."
"오빠야?" 선자가 한수의 심각한 얼굴을 살폈다.
"난 오사카에 아내와 애가 셋 있어."
선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가 천천히 닫혔다. 한수 오빠가 다른 누군가와 있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파친코 1권, 78p]
이러한 면은 기독교인들이 감정적으로만 다가갔을 때, 얼마나 쉽게 속아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보낼 때, 다음과 같이 걱정하며 말씀하셨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누가복음 10장 3절)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곤 했다. 기독교 초창기, 그리스 풍자작가인 '루키아노스'는 저작, [페레그리노스의 죽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회 구성원 상당수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문맹인 경우도 많았는지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잘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행상꾼 페레그리노스는 오로지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을 등쳐먹기 위한 속셈으로 교회에 입교했다. 나중에 그는 당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순진하게도 여전히 그를 믿었고, 부지런히 감옥을 찾아 음식과 돈을 전해주며 그를 마치 영웅인 양 대했다.
저 불쌍한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가 되어 영원히 살 것 이라고 믿네. 그들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경멸하고 이것이 모 두의 소유물이라 생각하지. 아무런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런 가르침을 대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네. 따라서 호기를 잡을 수 있는 사기꾼이 그들을 찾아가면, 그들의 단순함을 이용해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다네.
[페리그리노스의 죽음 중]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세계의 협잡꾼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이것을 한민족의 경우로 치환해서 설명하자면, 한국인들은 협잡꾼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고 본다. 한국의 역사는 항상 핍박받은 역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하게 살아남았다. 그들은 상황은 해소하지 못했지만, 감정을 흥으로 해소했다. 이 지점은 소리꾼을 다룬 임권택의 영화, [서편제]에서 나온 '진도 아리랑' 파트에서 잘 드러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0IvQK_q2u7s
그들은 쫓겨나와서 털레털레 걷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리랑 한곡조를 부르자,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감응'되어 문제 상황이 더 이상 상관없어진 것이었다. 초반에는 진양조로 시작하던 슬픈 곡조는 시간이 흐르자 장단이 빨라지며 그들의 감정이 변한 것이다. 참 신기한 면모인것 같다. 하지만, 현재 청년 전도가 힘든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청년들은 더 이상 '감정'에 '감응'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성' 통해 신앙을 갖고자 한다. 따라서, 감정을 통한 '감응'으로 이어지는 신앙을 청년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셈이다.
청년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왜?'라는 궁금증을 해결해줘야만 하는 부분이다. 여태까지의 한국인의 정서상, '이성'을 쓰기란 굉장히 어려웠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문제를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데 익숙했다.
굉장히 잘못 설교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경 구절
개인적으로 굉장히 잘못 설교되고 있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 바로, 전도에 있어서 항상 인용되는 누가복음 8장이다.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누가복음 8장 4-8절]
이것을 어떻게 설교하나면, 사람의 마음 밭에 해당 땅을 비유한다. 어떤 마음은 바위가 많은 마음이고, 어떤 마음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다. 어떤 마음은 좋은 땅이므로,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어떤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는 사람들 족족에게 다 전도를 해야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노방전도이다. 정말 무차별적으로 씨를 뿌리다가, 결실을 얻어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먼저 씨를 뿌리기 전에 해당 사람의 마음이 돌밭인지, 가시떨기인지, 비옥한 땅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돌밭이면 먼저 돌을 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가시떨기 밭이면 가시떨기를 제거하는 것이 먼저이다. 랜덤하게 얻어걸려라, 라고 마구잡이로 씨를 뿌리면 안된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적당한 곳에 쓰시겠지, 라고 생각해서 믿고 헌금했기에 현재 교회의 많은 문제점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아마 해당 구절을 서양인들, 특히 로마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이기 때문이다.
해당 밭이 돌밭인지, 가시 밭인지, 아니면 비옥한 밭인지 분석한다.
만약에 돌밭이라면 먼저 돌들을 걷어내고, 비옥하게 만든 후, 그다음에 씨를 뿌린다.
가시 밭도 마찬가지. 가시덤불들을 걷어내고 그 다음에 씨를 뿌린다.
효율적으로, 맞춤형으로 일을 진행한다.
서양인들이 얼마나 이성적이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1634년 그려진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작품 <카디스 수비대>에선 병에 걸린 Don Fernando Girón,이 의자에 앉아 조그만 지휘봉으로 군대를 통제한다. 그의 육체는 쇠약하나 정신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한다. 이것은 '감정'을 통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다.
현재 21세기는 '이성'이 전세계적으로 지배하는 시대이다. 만약 복음을 '이성'적으로 전할 수 있다면, 분명 청년 세대들의 전도 또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최근에 '삼프로 TV'에서 김학철 교수님이 이성적으로 기독교를 설명했다. 엄청나게 열광적인 반응이었고, 댓글창 또한 기독교를 내가 잘 몰랐다는 반응, 감사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어루만져, '감응'시키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이성적'인 부분도 가지고 계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분명 방법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엄청 똑똑하고 성실하다. 단 하나의 단점은 너무나도 감정적이란 점이다. 감정과 이성 간의 균형만 찾으면 한국인들은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또한 감정적인 방법만이 아닌, 이성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를 전하면 분명 한국의 기독교 또한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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