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제라블(5): 드디어 사람이 된 인간들

이렁비니 2024. 2. 21. 20:00

레 미제라블, 해당 뮤지컬의 제목(Les Misérables)은  한글로 번역하면 '비참한 자들'이란 의미이다. 세계 명작 소설이자, 세계 4대 뮤지컬의 이름치고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만약 어떤 감독이 투자자에게 와서, "제가 만들 영화의 내용은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비참한 자들'이에요. 제게 투자를 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선뜻 투자할 마음이 들까? 흥행이 보장될지 의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소설 이름을 '비참한 자들'이라고 붙였을까?


사람이 되는 조건 [사람, 장소, 환대]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인류학자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의 서두에 언급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굉장히 특이한 소설이다. 주인공 슐레밀은 악마와 거래를 한다. 그러나 그는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악마에게 무엇을 팔았을까? 소설의 제목 그대로 그는 '그림자'를 팔았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대로 금화를 주는 마법 자루를 받았다. 이제 슐레밀에겐 꽃길만이 남았다. 그림자는 쓸데 없다. 아마 그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저 바보같은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판것도 아니다! 영혼이라면 팔지 않았겠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고작 그림자! 악마는 바보였군. 꽤나 괜찮은 거래였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기피하기 시작한다. 왜냐, 그는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없는 슐레밀을 사람들은 피한다. 슐레밀은 분명 영혼과 육신이 있는 인간이다. 돈도 많고, 부족한 것이 없다. 단 하나, 그림자만이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판 그림자는 무엇일까?

2019년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폰 샤미소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서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녀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과 인간은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태어난다고 바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연적 사실이지만, 사람은 사회적 인정이다. 사람은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인간 ≠ 사람

 인간사람
자격이 어떻게 주어지는가?태어나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주어짐.사회적 인정과 합의가 필요하다.

21세기에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인간과 사람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슐레밀의 경우처럼 인간이지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인간이지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

1)태아
전통적인 과거 사회에서 태아는 인간이지만, 아직 사람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출생 직후부터 사회적 인정 간에 어느정도의 일정한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고대 로마에선 새로 태어난 한 아이가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태어나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가족의 가장 역할인 아버지가 아이를 가족으로 인정해야지만 비로소 가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기가 태어난 후 그들은 이름을 바로 지어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배내옷을 입히고, 금줄을 100일동안 집 밖에 걸어두었다. 100일이 지난 후에 비로소 그들은 아기를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기에게 입혔던 배냇저고리. 이 옷을 입히는 기간동안 아기는 아직 가족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 상태이다. (출처: 우리문화신문)

2) 노예
투아레그의 격언에는 '노예는 태아와 같다'라는 말이 있다. 많은 수의 노예들은 포로들, 그들은 원래 있던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실종자이다. 노예에겐 얼굴과 이름을 가질 수 없고,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체면과 명예도 없다.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고 타인 앞에 현상할 수 없다. 태생적 권리가 없기에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 노예의 신분이 세습되는 것은 해당 노예를 부양하는데 든 비용이 노예가 주인에게 진 빚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예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나오는 악당, 스티븐. 그는 노예지만 다른 노예들을 괴롭히는 악당이다.  그는 노예지만 백인 주인처럼 양복을 입고 있다.

과거 미국 흑인 노예들은 백인 전용 공간에 갈 수 없었다.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제복을 입는 경우. 제복을 입는다는 의미는 종속의 표시이다. 제복을 통해 흑인의 얼굴은 사라지고 그들을 고용한 백인 대리인의 얼굴만 보이게 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장고:분노의 추적자'를 보자.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악역, '스티븐'은 노예지만 백인 주인인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양복을 입고 있다. 스티븐은 분명 노예지만 백인들과 같은 양복을 입고 있기에 캘빈 캔디는 그를 노예가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다른 노예들은 인간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스티븐은 사람이다. 그는 제복을 입고 있기에 백인들은 그를 노예가 아닌, 백인의 대리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백인 주인, 캘빈 캔디의 죽음에 스티븐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오열한다.

여기서 짚고 가야할 중요한 점이 있다. 이 관점은 노예 주인을 옹호하는 관점이 아니다. 그저 그 당시에는 사람의 영역이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많은 노예를 거느리는 것은 지금으로치면 많은 로봇들을 거느리는 것에 불과했다. 누가 많은 로봇들을 부린다고 그를 비인간적인 나쁜 사람으로 여길 수 있을까? 노예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애초에 그들은 단 한순간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당시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노예를 죽이는 것은 살인죄가 아니라 기물파손죄에 해당된다. 지금의 관점에선 너무나 비인간적이지만, 이것은 시대적 한계였고, 인류의 역사를 거쳐오며 조금씩 사람의 영역은 확장되어왔다. 하지만 그당시에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영역이 거기까지 확장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전통 사회에서 성인식이 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그들은 성인식을 통과할 때 비로소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받는 셈이다. 그러나 인권이 많이 향상된 지금, 인간의 권리는 사람의 권리와 거의 동일시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태어나자마자 사람이 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인식되지 못한 가난한 인간들

레 미제라블 뮤지컬의 넘버, 'At the End of the day'은 프롤로그가 끝난 후, 바로 이어서 나오는 넘버다.
이 넘버는 가난한 자들의 코러스 합창으로 시작된다.

At the End of the Day

It's a struggle, it's a war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자 전투!

And there's nothing that anyone's giving

도와주는 이 하나 없네

One more day standing about

하루 더 사는 게

What is it for?

아무 의미 없지
(At the end of the day 가사 중)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 그들은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하루하루의 빚을 갚아나가며 살아갈 뿐이었다. 말그대로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죽은 채로 하루하루 지낼 뿐이다. 그들을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사회적으로 없는 존재들이다. 눈에 띄지 않고,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삶, [사람, 장소, 환대]에는 이를 '얼굴이 없다'라고 설명한다. 레 미제라블의 제목, '비참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얼굴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존재했지만, 사회적으로 그들은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자선을 베풀, 동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상대가 존재해야지 적선을 하든 뭘 하든 할 것 아닌가. 
 
빅토르 위고가 살던 당시, 프랑스의 법은 사람을 위한 법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주로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이 만든 법은 '비참한 자들'을 위한 법이 아니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태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인 셈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었다. 차별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식해야지 '차별'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만, 이당시에 가난한 자들은 인식 자체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차별이 아니었다. 그들이 역사책에 기록된 적이 있는가? 없다. 그들은 무명인들(이름 없는 자들)이었고, 그냥 이름 없이 죽어갔다. 빅토르 위고는 이러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그의 소설 이름을 '비참한 자들'이라고 지은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너무나도 관심이 없어서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던, 그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든 셈이다.
실제로 레미제라블의 출판 이후, 빈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했다. 따라서 레미제라블은 현재의 복지 정책에 큰 역할을 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니 시대가 지나도 꾸준히 사랑받는 명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

2000년 전,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 그 중에서도 변방인 갈릴리 호수, 그 호수 인근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사렛, 가버나움, 막달라... 등등. 이런 마을들은 구경거리도 없고, 가봤자 별 이득도 없는 그 마을들이었다. 그들을 찾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요한복음 1장 46절)

 
그 마을들은 어찌나 볼품없었는지, 나다니엘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지금 관점에서 다시 말해보자면, "미국의 다 죽어가는 디트로이트 시티의 할렘가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 그런 곳은 갱스터나 마약이나 해대는 쓰레기들만 모여있는 곳인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마약 할렘굴에서 성자가 나오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나다니엘이 이렇게 말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남들이 찾지 않는 곳만을 골라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마을들 가운데서도 버려지고 비참한 자들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이 물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람도 아닙니다! 왜 그들을 찾으러 다니시나요? 무엇을 위해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백번 맞는 말이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으니 그들을 무시하기란 쉬웠다. 그들은 없는 존재들, 그림자가 없는 존재들이었고,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애초에 없는 존재들이었기에...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지나칠 수 없었다. 내 생각에 그의 공생애에서 진정한 기적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자들을 눈 뜨게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행한 가장 큰 기적은 그 누구도 관심이 없던 그들을 그들 인생 처음으로 '사람'으로 대해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합의가 필요했다. 사회 구성원들이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그들과 함께 빵을 먹고 그들을 위해 설교를 한 것이다. 이게 무슨 특별한 일이냐,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은 인권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200년 전의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아니, 단지 100년전의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천민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천민 뿐만이 아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일본의 부라쿠민들도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물며 20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러한 모든 사회적 관습을 깨부순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혁명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같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방정환 선생님이 한 일이 무엇인가. 어린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다, 라고 주장하며 '어린이날'을 만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또한 어린아이들이 자신으로 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3절)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다. 과부, 병자, 혈루병을 앓던 여인, 세리... 그가 찾은 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자들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던 이들이 아니다! 아예 존재하지 않던, 얼굴조차도 없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름없이 죽어갈 운명에 불과하던 무명인들,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할 이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이들을 찾은 이유는 하나이다.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들에게 얼굴을 만들어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21세기로.

은둔 고립 청년, 독거노인, 쪽방촌 주민들 등등. 현대 사회에도 2000년전 이스라엘 땅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래도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복지 정책들이 생겨나서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21세기엔 인간과 사람의 경계가 거의 동일시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누구나 다 인권을 지닌 존재라고 사회적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과거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라는 남자는 처음으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자들을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사람의 범주를 넓힌 것이다. 이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다, 라고 행동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사후에도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사람의 범주는 커져갔다. 사람의 권리를 만들고 지켜나가기 위해 수많은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흑인 노예 해방, 여성의 참정권, 신분제 철폐, 자유민주주의 등등... 이러한 예시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모든 과정들이 '사람'의 범주를 넓히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2000년동안 그렇게 조금씩 '사람'의 경계는 넓어져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이 사역은 현재까진 나름 성공적인 것 같다. 현재에는 인간과 사람의 경계가 거의 동일시되고, 누구나 다 동의하는 합의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과거 어린이들은 사람이 아닌 존재로 취급되었다면, 현재 어린이들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할 인격체로 여겨진다. 그외에도 피부색과 상관없이 누구나 다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라는 점도 사회적 동의가 어느정도 이루어졌다. 여전히 사회적 차별 등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2000년 전에 비하면 꽤나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린이들을 보호받아야할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예시가 학교 앞 스쿨존, 어린이 보호구역.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존재조차 아무도 알지 못하던 비참한 자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는 과거 2000년전 이스라엘 땅에서 한 사나이가 했던 것처럼 얼굴 없는 자들에게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의 국민 작가가 되었고 그가 쓴 소설은 현재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