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개과천선한 인물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자주 언급된다. 그는 빵을 훔친 죄와 탈옥하려 한 죄 때문에 수많은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풀려난 그는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사람들에게 여전히 무시되곤 했다. 결국 그는 한 수도원에서 값나가는 은촛대를 훔쳤다. 그러나 그의 절도행각은 곧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수도원의 주교, 미리엘 주교는 그를 용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발장은 개과천선하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이로 태어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레미제라블 뮤지컬의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만약 한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약 장발장이 은촛대 값을 미리엘 주교에게 지불했다면?
이해할 수 없는 자, '미리엘 주교'
해당 뮤지컬 넘버엔 프롤로그 부분, 장발장이 잡히는 부분부터, 미리엘 주교가 그를 용서하는 장면까지가 가사로 담겨있다.
장발장이 변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며, 그의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이기도 하다.
The Bishop(미리엘 주교)
순경: 선생님, 우리는 당신의 은촛대를 찾았습니다.
Monsignor, we have your silver
우리는 이 남자를 적발했습니다.
We caught this man red-handed
그는 당신이 그에게 이것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He had the nerve to say you gave him this
주교: 그말이 맞습니다.
That is right.
[장발장에게]
친구여, 하지만 자넨 너무 일찍 떠났어.
But my friend you left so early
그리고 무언가를 잊고 갔지.
Surely something slipped your mind
이것들 또한 자네에게 줬다는 것을 까먹고
You forgot I gave these also
놓고 가버렸지 뭔가?
Would you leave the best behind?
[순경에게]
선생님, 그를 풀어주세요
Monsieur, release him
이 사람 말은 사실이네.
This man has spoken true
당신의 임무를 칭찬합니다
I commend you for your duty
이제 신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 가길 바랍니다
Now God's blessing go with you
[장발장에게]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둬, 내 형제여
But remember this, my brother
이 자비에는 높으신 분(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See in this some higher plan
이 소중한 은으로
You must use this precious silver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네.
To become an honest man
천국의 순교자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By the witness of the martyrs
고난과 흘린 피를 통해
By the passion and the blood
하나님께서 자네를 어둠에서 건져 올려주셨으니
God has raised you out of darkness
이제 자네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라!
I have saved your soul for God
대략적인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장발장은 주교님으로부터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주교님이 베푼 은혜를 배신하고 은촛대를 훔쳤다. 그의 절도행각은 순경들에게 발각되고 그는 다시 주교님께 끌려왔다. 여기서 주교님은 한마디만 하면 장발장은 다시 감옥에 가게 된다. 장발장도 스스로 각오했을 것이다. '내가 벌을 받는구나.'
하지만 장발장은 깜짝 놀랐다! 주교님이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응당 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감싸기 위해 순경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장발장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여태껏 자신이 만나온 사람들은 나를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자로 보았다.
그들은 나를 멸시하고, 쓰레기처럼 보았다. 그러니 나 또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쓰레기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이 주교님은 뭐지?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오히려 훔치려한 은촛대를 주다니.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지?
장발장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형을 다 살고 나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나를 도둑질이나 했던 인간 쓰레기라고 여기며 멸시하지. 그들이 그렇게 여기니 나도 그렇게 쓰레기처럼 행동할 수 밖에!' 그는 세상이 자신을 버렸으니, 나 또한 세상을 멸시하겠다,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도둑이 되어주지, 라고 생각하며 은촛대를 훔쳤다. 아마 장발장이 감옥에 다시 들어갔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을 멸시하며 시니컬한 태도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엔 이것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증오, 버림받음, 멸시....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장발장은 이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런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는 은촛대를 장발장에게 주고 그의 범죄 행각을 숨겨줌으로서 이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장발장이 너무나 오래전에 잊어버린, '사랑'이었다.
뻔뻔한 장발장? 그가 그의 죄를 뉘우쳤다고 말할 수 있을까?
먼저, 용서를 받은 직후 장발장의 상태를 살펴보자. 은촛대를 받은 장발장은 혼란스럽다. 아무리 실익을 따져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주교님의 행동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 커져가며 장발장은 그의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도대체 미리엘 주교는 나를 왜 용서한거지? 도둑질이나 해대는 나를? 내 삶은 뭐였지? 나는 여태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거지? 이것은 내가 전혀 모르던 것... 나는 평생 잘못된 것들을 좇으며 살아왔던 것인가?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그의 혼란은 뒤이어 이어지는 넘버, '장발장의 독백'(Valjean's Soliloquy)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독백을 보면, 그의 심경의 변화가 잘 드러난다. 여태까지 장발장이 살던 세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만 하는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결국 장발장은 삶 전부가 부정당하게 된다. 내가 모르던 세상이 있다고? 장발장은 자신의 이전 삶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그의 인생 처음으로, '사랑'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What spirit comes to move my life?
Is there another way to go?
어떤 영혼이 내 삶을 변화시킬까?
달리 갈 길이 있을까? (레미제라블 'Valjean's Soliloquy' 가사 중)
미리엘 주교가 보여준 사랑이 장발장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사자성어로는 '개과천선'한 셈이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자. 장발장은 굉장히 뻔뻔한 사람이다. 왜냐?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리엘 주교에게서 값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그러니, 나는 주교님 옆에 머무르며 그를 섬겨야 한다!
이것만이 그의 큰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진정으로 그가 개과천선하고 죄를 뉘우친다면, 그는 미리엘 주교 옆에 남아있어야 했다. 주교님 옆에서 은혜를 갚아야 했다. 장발장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수도원의 허드렛일이라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데 장발장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보면, 한낱 산짐승, 들짐승에 불과한 미물들이라 할지라도 은혜를 제공한 당사자에게 은혜를 갚는다. 설령 그 방식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방안이라 할지라도.
한낱 미물보다 못한 장발장?
'은혜갚은 까치'라는 전래동화를 보자.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구렁이를 죽여서 까치 가족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선비는 한 오두막에 머물게 된다. 이윽고 예쁜 아가씨가 선비를 맞이했고,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잠들었다. 그러나 사실 그 아가씨는 선비가 죽인 구렁이의 부인 구렁이이었다. 꼼짝없이 죽게 된 선비. 그는 구렁이와 딜을 한다.
"날이 밝기 전 언덕 위에 빈 절에 있는 종이 3번 울린다면 나를 살려주시오!"
승낙한 구렁이. 그러나 아무도 없이 버려진 절에 누가 종을 한밤중에 치겠는가. 날은 점점 밝아오고... 그때, 종이 총 3번 울린다. 구렁이는 선비를 살려주고 사라지고, 의아한 선비는 언덕 위 절로 가본다. 그리고 그는 종루 바닥에 머리가 깨진 채 죽은 까치를 발견한다. 알고보니 전날 선비가 구해준 까치 가족의 부모 까치가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을 내던져 있는 힘껏 종을 친 것이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인 까치라도 은혜를 받았으면 갚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은혜를 갚았나? 아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해서라도 이 빚을 갚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수도원에 더 머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을 나갔다. 까치보다도 못한 장발장! 뻔뻔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또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과연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이 자신에게 은혜를 갚기를 바랐을까? 아니었다!
미리엘 주교 또한 장발장이 은혜를 자신에게 갚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장발장에게 값없이 은촛대를 주었을 뿐이다. 순경들이 가고 난 후, 주교님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내가 너를 구해주었다. 그러니 여기 수도원에 머무르며 예배도 드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참회해라.
만약 미리엘 주교가 진정 장발장을 개과천선 시켜주고 싶었다면, 그를 수도원에 남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수도원에서 주교님의 설교말씀도 듣고, 예배도 드리며 지낸다면 그는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미리엘 주교님을 이어서 신부로써 제2의 인생을 살았을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보낸다면 장발장은 다시 도둑질이나 하며 살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얘를 수도원에 남겨서 교화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주교님을 그러지 않았다. 장발장을 보내주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곰곰히 따져보면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 빚을 지고 있어
장발장이 수도원을 떠난 순간, 그는 영원한 채무자로 남게 된다. 이제 미리엘 주교의 은혜를 그에게 갚을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까치보다도 못한 장발장! 뻔뻔스러운 장발장! 여태껏 그는 도망자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채무자까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장발장이 지게 된 빚은 무엇일까? 이것은 미리엘 주교가 보여준 '사랑'이다. 그는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지게 된 셈이다.
이 '사랑의 빚'이란 굉장히 신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빚은 나쁜 것이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진다는 말은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빚은 빨리 갚아버려야 한다. 채무가 쌓인다면 신용등급이 점점 내려가며 결국 그는 파산하게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빚은 다르다.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임재범-너를 위해'가사 중)
임재범도 그의 명곡, '너를 위해'에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사랑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채무관계로 남아있는 것이 유익하다. 일반적인 빚의 개념과는 다르다. 보통의 빚은 '지는 것'이 아니라, '갚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빚을 지는 것이 의무이다. 임재범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
(로마서 13장 8절)
로마서의 이 구절을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역사'에 이렇게 풀이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은 무한하다. 그러나 거래의 관계는 유한하다.
거래의 빚을 다 갚으면 그 관계는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무한한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선 빚을 계속 져야만 한다.
키르케고르의 설명을 조금 더 살펴보자.
연인이 상대에게 희생을 했다고 하자. 그러고 난 후 ‘자 이제 나는 나의 빚을 다 갚았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냉혹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거래관계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다. 연인이 희생을 하고서도 ‘내게 소원이 있다. 계속해서 빚을 지고 있게 해달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말이 아닐까? 사랑은 대차관계처럼 생각될 수 없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계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때엔 계산을 할 수 없다. 계산은 유한한 범주를 쓴다. 하지만 사랑은 무한하다. 그러니 사랑의 빚을 갚는 다는 것은 사랑을 대차관계로 여기는 것, 사랑을 유한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사랑을 갚아야 할 짐덩어로 여긴다. 하지만 사랑은 빚을 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 빚을 질 수 있다. (키르케고르-'사랑의 역사' 중)
사랑은 너무나도 거대한 개념이다. 이것은 무한한 개념이므로, 애초에 갚아나갈 수가 없다. 갚는다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빚이 몇조라면 평생동안 이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하물며 무한대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니 이것을 갚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갚으라고 있는 빚인데... 갚지 않고 채무자로 여전히 남아있으라고 하다니...?
영원한 채무자, 장발장
잠깐, 다시 장발장으로 넘어와보자. 장발장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다. 헉. 큰일이다! 그는 이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는 전과자에, 셀수도 없는 빚을 지게 된 신용불량자에, 까치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갚을 수 없기에, 사랑인 것이다. 까치는 은혜를 갚을 수 있다. 그러나 까치는 사랑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장발장은 사랑을 알 수 있다. 알 뿐 만 아니라, 직접 그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다.
미리엘 주교도 생각해보자. 주교는 장발장을 용서하면서 그 빚을 갚으라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말은,
하나님께서 자네를 어둠에서 건져 올려주셨으니
이제 자네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라! (The Bishop 가사 중)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에게 그의 채무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고 있다. 그의 채무는 미리엘 주교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의 채무는 신(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은혜 갚은 까치에서 까치가 받은 은혜는 선비에게서 왔다. 선비는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까치는 채무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발장의 채무는 그렇지 않다. 그의 채무는 미리엘 주교라는 통로를 통해 신(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런데 신은 무한한 존재. 무한한 이에게 진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 장발장은 큰일났다. 남은 인생 평생 이 무한한 빚을 갚다 죽게 생겼다.
한번 까치가 진 빚과 장발장의 빚을 비교해보았다. 이렇게 표로 정리해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장발장과 까치의 빚>
장발장 | 은혜 갚은 까치 | |
빚을 진 대상? | 신(하나님) *미리엘 주교는 그 빚을 전해주는 통로역할이니, 궁극적으로 그는 신으로부터 빚을 졌다. |
선비 |
빚을 갚을 수 있는가? | 불가능. 무한한 채무 관계이기에 | 힘들지만 가능하다. |
빚을 진 직후의 반응? | 얼떨떨. 혼란스러움. 인식이 불가능할정도로 너무나도 큰 개념이기에 혼란스럽다. |
얼른 빨리 갚아버려야할 채무 관계로 빚을 인식함. |
빚을 지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의 반응? | 이전의 장발장은 죽었다. 개과천선하고 다시 태어난 장발장! |
그는 여전히 까치. 빚을 갚긴 했지만 그것 뿐, 빚을 갚은 까치일 뿐이다. |
사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 무한한 채무 관계안에 놓인 상태로 사는 것이다.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가 이 사랑의 빚이다.
보통의 빚은 까치처럼 갚아버려야하는 채무다. 채무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사랑의 빚은 갚지 않고 계속해서 채무 상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임재범의 가사처럼, 매일매일 갚지도 못할 빚을 지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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