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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2) '자베르 경감': 사랑을 마주한 이는 어떻게 되는가?

이렁비니 2024. 2. 3. 20:05

앞선 포스팅에 이어서, 다시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세계적인 뮤지컬 중 하나인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쫓던 '자베르 경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자베르 경감. 그는 불쌍한 인물이다.

별을 두고 맹세하다

뮤지컬에는 장발장을 쫓던 자베르 경감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던 인물이었고, 그 신념에 따라 장발장을 좇는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간의 천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개과천선했다는 장발장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는 그 어떤 인간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믿은 것은 저 하늘의 별들.

그에게 하늘의 별들은 언제까지나 신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수호자들과도 같았다.

저 수많은 빛들 셀 수도 없이
Stars, In your multitudes scarce to be counted

어둠 밝히네 늘 한결같이
Filling the darkness with order and light

마치 병사처럼 듬직하게
You are the sentinels silent and sure

이 밤을 지키네, 이 밤을 지키네
Keeping watch in the night, Keeping watch in the night
(레 미제라블 'Stars' 가사 중)

 

별들은 밤이 되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빛났으며, 절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별들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자베르 경감은 밤마다 거리를 거닐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믿는 굳건한 신념을 되새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별들은 절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달은 두고 맹세하지 말아요.
궤도를 따라 돌면서 매달 변하는 달은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변덕스럽지 않다면요.
(로미오와 줄리엣 중, 줄리엣의 대사)

 

NT LIVE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장면. 그둘은 뒤에 큼지막히 떠있는 보름달을 배경으로 발코니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로미오는 줄리엣에게 달을 두고 맹세한다. 그러자, 줄리엣은 매번 모양을 변하는 변덕스러운 달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한다.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매번 모양을 변하는 달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그자리에 가만히 존재하는 별들, 그리고 매번 모양을 변하는 달. 이 둘을 비교하면 당연히 변하지 않는 별에 맹세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자베르 경감은 별을 두고 맹세한다. 장발장을 끝까지 쫓겠다고. 그렇다면 별을 두고 맹세한 예시는 또다른 예시는 무엇이 있을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장 5절)

 

구약의 창세기에는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할 때, 별들을 두고 맹세한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는 별들.

아마 구약에 나오는 이 맹세는 인류가 별을 걸고 받은 최초의 언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깨어지지 않았고, 실제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하늘의 뭇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아마 자베르 경감 또한 이러한 깨어지지 않는 신념을 믿고 있었고, 그 신념의 증거인 별에 걸고 장발장을 잡으리라고 맹세했을 것이다. 


법, 그리고 율법.

자베르가 믿는 신념이란 '법'이었다. 법은 그에게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모든 이들은 이 법 아래에 존재했고, 따라서 법은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는 이 신념에 따라 장발장을 체포했고, 달아난 후에도 수십년간 그를 추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한번 악인은 영원한 악인이었고, 그들에겐 개과천선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엄중한 법의 잣대를 들이밀어야만 한다.

그의 법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그의 다른 넘버, 'The Cofrontation'에서 잘 드러난다.

당신 같은 인간들은 절대 변해, 같은 인간들은

Men like you can never change, A man such as you…

 

의무는 법대로 하는 거야

My duty’s to the law

 

모든 이가 죄를 안고 태어나지

Every man is born in sin
(The cofrontation 가사 중)

 

모든 이들이 죄를 안고 태어나지, 라는 대사를 보면 장발장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생각을 엿볼수 있다. 그는 사람이란 원래 악한 죄인이므로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선 법으로 다스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강제성을 지니고,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 자베르는 굉장히 외로운 자였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악인이라는 신념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이들은 '자기 자신' 또한 포함이다. 아마 자베르는 타인 뿐 아니라, 자신조차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자기 혐오로 이어지고, 그는 이 문제를 외면하기 위해 '법'이라는 절대적인 신념에 매달리게 되었다. 따라서 자베르에게 '법'은 그가 살아가는 가치이자,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주었다. 그는 여태까지 이 원칙에 따라 나름 잘 살아왔다. 장발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원칙과 질서로 움직이던 자베르 경감의 인생에 장발장이 나타났다. 그 둘의 신념은 서로 충돌하게 된다.


장발장, 그는 자베르에게 어떤 인물인가?

자베르 경감은 '법'에 따라 살고 죽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믿던 '법'에 균열을 만드는 이가 나타났다. 장발장.

자베르가 '법'에 따라 행동한다면, 장발장은 '사랑'에 따라 행동한다. 자베르의 인생에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가 굳게 믿고 있던 신념, 어찌나 굳게 믿었는지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변하지 않을 것이라던 그 신념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자베르에겐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그의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자였다.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사람들의 반응은 처음엔 부정이다. 당신은 틀렸다고,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애써 상대를 무시한다. 그러나 상대가 계속해서 다가오면, 두려움을 느낀다. 왜 두려움을 느끼는가? 그것은 자신이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모든 사람들은 두 다리로 걷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두 팔로 물구나무서서 걷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저 사람은 뭐지? 귀신인가!! 가까이 다가오지마! 생각만해도 무서운 일이다. 

초록불에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어느날 이 법칙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혼돈 그 자체의 세상이 온다.

 

횡단보도는 초록불에 건너야 한다, 음주운전을 하면 안된다, 절도를 하면 감옥에 가야한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

이 사회를 유지하던 모든 법칙들이 깡그리 다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장발장은 자베르에게 공포 그 자체다. 그의 상식 밖에 존재하는 인물인 것이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Who is this man?
이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What sort of devil is he?
이자는 무슨 악마인가?

To have me caught in a trap
날 함정속에 빠뜨리고

And choose to let me go free?
날 놓아주다니?
(Javert's Soliloquy 가사 중)
 

 

결국, 자베르는 자신이 여태껏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별에 대고 맹세한 맹세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나는 신실한 맹세를 했는데....

이제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자베르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간다.

결국 자베르의 세상은 무너진다. 그리고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장발장이 자신을 살려준 것을 혼란스러워하는 자베르 경감. 장발장은 사랑으로 자베르를 살려줬으나, 결국 이 때문에 자베르의 세상은 무너지게 된다.


사람이 '사랑'을 알게 된다면?

장발장은 '사랑'을 원동력 삼아 움직이는 자였다. 따라서 자베르는 장발장을 통해 사랑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사랑'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흔히들 생각하는 생각은 정말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사랑을 만나게 되면 공포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사랑은 여태껏 자신이 알던 세상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 명예, 명성 혹은 법이나 돈... 이런 것들을 신념으로 믿고 살아가는 이들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정말 드물다.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고 움직이는 자들! 그들은 진정한 역행자들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를 사랑해야한다,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에도 상대를 사랑해주는 이를 만나라... 물론 이것도 사랑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사랑의 극히 일부분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사랑의 일부분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도 이러한 부분적인 사랑은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마태복음 5장 47-48절)

 

마태복음에도 분명, 너희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쉬워서 이방인들도 이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완전한 사랑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저런 부분적인 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을 마주한다면...?

예상 외로 사람들은 공포에 빠지게 된다. 너무나도 두렵기에, 분노하거나, 애써 무시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행자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진정한 역행자,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

자기계발서 베스트 셀러인 '역행자'에서도 역행자들을 순리에 대항해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역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의 7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간다면 진정한 역행자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맞을까?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역행자'. 그러나 사실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는 이들이 진정한 역행자들이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 안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안에는 자본주의의 법칙들이 있다. 요즘은 이 법칙들에 대해 너무나도 소개를 잘 하고 있는 책들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책들은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순응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간단하게는 주식투자부터, SNS을 통한 셀프 브랜딩... 등등. 자청이 만든 '역행자'라는 책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순응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기에 자본주의의 법칙 하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역행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본이 아닌 사랑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자베르 경감이 살던 당시엔 법치주의가 지배했다면, 현재는 자본주의가 지배한 세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본을 원동력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장발장과 같은 '사랑'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성경의 어휘로 바라보자면,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정말 비합리적인 일들을 한다.

 

그러니 그들을 만난 이들은 그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가온다면 그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사실 그 분노의 저변에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무너질까봐, 엄청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원동력으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저항하고, 도망친다.

사랑은 자베르가 신뢰하던 법을 온전하게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베르 경감은 잘못된 신념을 따르던 사람이란 말인가? 그의 인생은 통째로 부정당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자베르는 자신이 따르던 법을 신념으로 지켰다. 그것은 옳은 길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다.

이제 온전한 것이 왔으므로, 부분적인 것은 버려지게 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7절)

 

여기서 '율법'은 자베르가 믿던 '법'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법은 사회를 이루는데 꼭 필요하다. 하지만 법은 불완전하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시기의 법은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부르주아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법의 망 밖에 있는 비참한 자들, Les Miserables들은 법을 어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비참한 자들에게 법이란 불완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장발장이 나타났다. '사랑'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자.

그리고 이 사랑은 법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완전하게 한다. 장발장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던 판틴을 위로하고, 코제트를 양녀로 거들었다. 또한 국가에 저항하던 반역자인 마리우스의 생명을 살렸다. 판틴, 코제트, 마리우스, 그들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던 이들이었다.

Les Miserables 비참한 자들, 법의 테두리 밖에 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장발장이 했던 것처럼 사랑은 법이 보호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보호해주고, 법을 완전하게 한다. 법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를 보완한다.

그러니, 자베르 경감이 믿고 따르던 '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단지, 이것은 한계가 분명한, 부분적인 것이었고, 이제 완전한 것 앞에서 부분적인 것은 버려져야 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9-10절)

 

해당 구절은 '사랑 장'으로 유명한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의 13장의 일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것이란 '사랑'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두려워한다. 사랑을 마주하면 자신이 여태껏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면하거나, 분노한다. 하지만 사랑은 불완전한 부분들을 완전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