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까지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세계 3대 뮤지컬중 하나인 '레 미제라블'을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뮤지컬의 넘버와 작품성 또한 인정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뮤지컬이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기에 간략한 내용과 시대적 배경은 다들 알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혁명 시기, 장발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물들간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대하 뮤지컬이다. 그렇다면 이 뮤지컬의 주제는 무엇일까?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민중의 노래)
레미제라블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넘버라고 생각한다.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독재 타도를 외치는 극중 학생들의 모습이 대한민국의 현대사 민주화 시위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몇년전 한창 대통령 퇴진시위가 벌어지던 당시, 뮤지컬 배우들은 모여서 해당 노래를 시위대 앞에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의 심정은 약 200년전 프랑스의 민중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민중들 또한 부정하고 부패한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이 내세운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었고,
이를 위해서 수많은 이들이 싸우다 죽어갔다. 이는 레미제라블 뮤지컬의 상징적인 장면인 바리게이트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레 미제라블'의 주제는 '자유와 평등'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실제로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뮤지컬의 가장 뼈대가 되는 주제는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 미제라블의 배경, '1832년 6월 봉기' 허무하게 실패한 봉기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을 뽑으라고 한다면 어떤 순간일까?
그 장대한 서사시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아니면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 혹은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에 큰 영향을 미친 인권 선언의 순간? 아니면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운 공화정 수립의 순간? 따지고 보면 굉장히 많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인이 프랑스 혁명을 시대적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한다면 혁명의 어떤 순간을 쓸 것인가?
아무래도 위에 언급된 극적인 순간을 배경으로 쓸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어나는 그들, 그리고 멋지게 승리하는 그 모습을 그려내고 싶을 것이다. 민중들은 그들의 희생을 보답받을 것이고, 그들의 피가 뿌려져 민주주의라는 꽃이 펼쳐지게 되리라... 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을까? 시대적 배경은 약간 다르지만(7월 혁명) 들라클루아의 이 그림과 비슷한 이미지의 소설이 그려질 것이다.
수많은 희생 앞에서도 결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민중들의 모습.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우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의 여신 옆에 쌍권총을 든 소년의 표정을 보아라.
그는 수많은 시체를 밟고 총알이 빗발치고 나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무언가를 외치며 당당히 나아간다. 아마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이런 인물들로 가득찬 이야기를 쓰지 않을까? 이렇게 결의에 찬 인물들을 통해 끝내 우린 승리하리라, 라는 멋있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의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의 생각은 약간 달랐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자유와 평등 이라는 혁명의 대의적 명분에 집중했다면, 그는 성공한 혁명을 배경으로 '레 미제라블'을 집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실패한 봉기, 1832년의 6월 봉기에 주목했다. 그들의 봉기는 군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단 하루만에 그들은 경비대들에게 진압당했다. 해당 봉기는 너무나도 빨리 끝나버렸기에 상대적으로 관심과 논의가 적었다.
뮤지컬 넘버 'Empty Chairs at Empty Tables'(빈 의자 빈 식탁)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인 마리우스의 허탈감과 슬픔이 드러난다.
차마 말도 못할 슬픔 고통만 더해가고
텅 빈 의자 텅 빈 탁자 모두 죽고 사라져 (Empty Chairs at Empty Tables 가사 중)
마리우스는 실패한 혁명을 마주하고 너무나도 슬퍼한다. 자신들과 함께 이상을 이야기하던 동료들은 사라지고 텅 빈 의자, 텅 빈 식탁만이 남은 것이다.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들의 동료들은 죽어가야만 했던 것인가?
자신들은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군중들은 그 명분을 따르지 않았다.
왜 빅토르 위고는 하필 단 하루만에 싱겁게 끝난 6월의 봉기를 소설 클라이막스로 넣어두었을까?
그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혁명의 끝은 허무하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만약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볼 때 프랑스 혁명에만 집중한다면, 우린 그 작품의 다른 큰 면모를 놓친 채로, 절반만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영화, '전함 포템킨'
1920년대, 소련에는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가 있었다. '전함 포템킨'.
해당 영화는 1905년 러시아에서 실제 있었던 '전함 포템킨호'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05년, 러시아에선 차르의 독재에 저항한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해, 구더기가 들끓는 썩은 고기를 배식받던 포템킨 호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병이 사망한다. 그 시체를 본 시민들은 이내 일어나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해당 봉기는 차르의 군대들에 의해 철저히 진압당한다. 군대는 시민들을 잔인하게 총으로 쏘며 학살한다.
여기까의 전개 방식은 레미제라블과 비슷하다. 왕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은 학살당한다는 점...
하지만 여기서부터 두 영화는 전개 방식이 달라진다.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본 포템킨 호의 수병들은 분노했고, 군대의 본거지인 '오데사 극장'을 포격한다.
이를 보고 재정 러시아의 함대들이 포템킨 호를 저지하기 위해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은 포격을 하지 않았고, 포템킨 호는 '우리와 함께 동참하라'라는 깃발 신호를 보낸다. 이에 전 함대들은 함포를 하늘 위로 올려 화답한다. 이윽고 포템킨호는 러시아 함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유유히 사라진다. 결국 그들의 봉기는 승리한 셈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재정 러시아의 함대들은 자신들의 대의에 동참하였고, 이보다 더 완벽한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영화를 만든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란 대중을 상대로 만들어지는 예술인만큼, 대중들을 계몽시키는데 탁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사회주의라는 대의명분에 동참하기를 바랬다. 영화의 결말에서, 전함 포템킨이 일으킨 봉기는 수많은 함대들이 함께 참여하며 혁명으로 발전되었다. 그는 이처럼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함께 동참한다면 같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나아가는 혁명의 물결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이 일으킨 봉기는 함대 하나를 통째로 탈취하고, 재정 러시아 육군의 본거지를 폭격했을 뿐 아니라, 전 함대가 그들과 함께 하게 된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의 혁명을 달랐다. 그들은 실패했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군중들은 두려움에 학생들을 외면했고, 그들의 눈 앞에서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렸다. 실패한 혁명. 대의명분 또한 사라졌다.
만약 빅토르 위고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자유와 평등'이었다면, 아마 영화 전함 포템킨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들은 실패했을까? 전함 포템킨의 배경인 오데사의 시민들과 다르게, 왜 파리의 시민들은 그들의 대의명분을 따르지 않았을까?
빅토르 위고는 실패한 혁명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레 미제라블의 결말. 실패한 혁명, 그러나 성공한 사랑.
봉기가 일어난 파리의 밤, 학생들은 바리게이트에서 전멸한다. 오직 단 한사람, 마리우스만이 장발장 덕분에 살아남게 된다.
이제 마리우스는 혁명의 실패를 경험했다. 동료들도 죽고, 삶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이제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만약 본인이 마리우스라면...? 다시 혁명을 시도해야하는가? 또 그 무의미한 희생을 치뤄야 하는가?
그러나 마리우스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장발장의 양녀, 코제트와 결혼한다.
혁명의 대의명분을 버리고, 결혼을 하다니! 굉장히 평범한 선택이다. 죽은 동료들의 입장에선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들의 입장에선 생존자들이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들이 못 이룬 대업을 완수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코제트를 택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빅토르 위고는 혼란했던 프랑스 혁명의 시기, 그 격동의 순간에 우리가 선택해야할 것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마리우스는 코제트라는 여인으로 대표되는, '사랑'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레미제라블의 결말이다.
프랑스 혁명은 단지 시대적 배경일 뿐, 레 미제라블의 스토리를 진행하는 힘은 사실 사랑이다.
레 미제라블은 사랑에서 시작하고, 사랑에서 끝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연인간의 사랑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타인에게 갖는 용서, 자비, 비참하고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의 제목은 '비참한 자들'이란 의미이다.
사랑을 모르던 비참한 이들이 사랑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레 미제라블은 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비록 자유와 평등처럼 거창해보이진 않더라도, 사랑은 결코 지지 않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흘러흘러 마치 강처럼 거대한 물결을 이루게 된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랑'이라는 주제로 '레 미제라블'의 줄거리를 다시 적어보자.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사랑으로 용서했다.
이전의 장발장을 사랑을 몰랐으나, 사랑을 알게 된 장발장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장발장은 사랑으로 판틴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녀의 딸, 코제트를 양녀로 들였다.
에포닌은 마리우스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리우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기꺼이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이어주었다.
코제트는 마리우스를 사랑했다. 그래서 장발장은 목숨을 걸고 마리우스를 구해주었다.
결국,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은 이어졌다.
한 커플의 사랑이 이어지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사랑이 필요했다.
에포닌, 장발장, 미리엘 주교... 그들의 사랑이 모이고 전달되어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사랑의 대서사시, 첫번째 사랑은 어떤 장면일까?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사랑'이 등장하는 장면은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을 용서하는 장면이다.
그는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한다.
형제여,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게. 이 자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이 소중한 은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네.
천국의 순교자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고난과 흘린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네를 어둠에서 건져 올려주셨으니
이제 자네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라!
과거 장발장은 사랑을 몰랐다. 그랬기에 마치 죽음과도 같은 죄인된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
이전의 장발장은 부분적으로 밖에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이제 완전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완전한 사랑.
사랑을 알게 된 그는 더 이상 사랑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는 괴로워하다가 결국 새 삶을 선택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빅토르 위고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은 무엇인가?
희망찬 내일을 이야기하던 자유와 평등은 실패했지만... 사랑은 절대 지지 않았다.
사랑은 장발장과 같은 비참한 자들, Les Miserables들을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다.
사랑은 판틴을 자유케 하고, 마리우스의 생명을 구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질 것이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
레미제라블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의 결말은 승리로 끝났다.
왜냐? 해당 성경의 구절처럼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실패할 때에도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결코 없어지지 않는가?
이를 알기 위해선 사랑의 원천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이를 위해 '레 미제라블'의 줄거리를 장발장을 중심으로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서로 사랑한다.
장발장의 사랑은 마리우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장발장의 사랑은 코제트를 양녀로 들이며 그녀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은 장발장을 개과천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은 어디에서 왔는가?
미리엘 주교는 그 사랑은 높으신 분,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설명한다.
어째서 왜 '하나님'께서 '사랑'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선 너무 긴 설명이 필요하니 또 다음에 추가적으로 설명하기로 하자.
만약... 사랑이 없다면? 다시 '전함 포템킨'으로
만약, 레미제라블에 '사랑'이 없었으면, 전함 포템킨이 되었을 것이다.
전함 포템킨에서 말하는 봉기는 대의명분만을 내세운 봉기....
다 같이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다 같이 더 밝은 미래를 위해 다 같이 힘차게 나아가는 혁명으로 이어지는 봉기.
두 영화의 결말만 놓고 보았을 때, 레미제라블은 실패했다. 그 결말에서 이룬 것은 한 부부의 결혼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함 포템킨은 다르다. 온 러시아 함대 전체가 다 그들의 봉기에 합류하여 그들은 승리로 나아간다. 규모부터가 다르다.
레미제라블의 에필로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은 현실이 아닌, 천당(?)같은 곳에서 부르는 장면이기에 제외해보자.
그렇다면 현실에서 끝나는 레미제라블의 엔딩은 너무나도 소박하다. 거기엔 장발장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 쌍의 부부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전함 포템킨의 강인하고 인원수도 많은 함대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해보인다.
그렇지만 레미제라블의 엔딩엔 사랑이 있다. 하지만 전함 포템킨의 엔딩엔 사랑이 없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의 구절처럼,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 하나만으로 사랑을 설명하기에 사랑은 너무나도 크다.
앞으로 다른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천천히 같이 '사랑'에 대해 알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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