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후반부, 장발장은 자신이 사랑하는 딸 '코제트'를 위해 마리우스를 구한다.
그는 의식불명인 상태의 마리우스를 발견하고, 그를 들쳐업고 하수구를 지나 그의 생명을 살린다.
그가 마리우스를 구하기 직전, 장발장은 'Bring him home'이라는 넘버를 부른다.
레 미제라블에서 'Do you hear the people singing', 'One day more' 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뮤지컬 넘버지만,
그럼에도 이 넘버가 보여주고 있는 점은 많다고 생각한다.
Bring him Home 가사
God on high, hear my prayer
신이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In my need, you have always been there
제가 힘이 들 때면, 언제든 그곳에 있어주셨지요
He is young, he's afraid
그는 아직 어리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Let him rest, heaven blessed
그에게 휴식을 주소서, 축복을 내려주소서
.
Bring him home
그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Bring him home
그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Bring him home
그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
He's like the son I might have known
신께서 허락만 하셨다면
If God had granted me a son
제게도 그만한 아들이 있었을 겁니다
The summers die, one by one
청춘이 덧없이 흩어집니다
How soon they fly, on and on
한 명씩, 한 명씩 아스라이 사라집니다
And I am old and will be gone
저는 늙었고,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지만
.
Bring him peace, bring him joy
그에게 평안를 내리소서, 기쁨을 내려주소서
He is young, he is only a boy
그는 아직 어리고, 평범한 소년일 뿐입니다
You can take, you can give
당신께서는 언제든 거두어가시고, 내려주실 수 있으매
Let him be, let him live
그를 살게하소서
If I die, let me die
원하신다면 저를 대신 죽이소서
Let him live
그를 살게하소서
.
Bring him home
그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Bring him home
그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Bring him home
그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행동하는 기도
그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가사다.
그리고 이 넘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장발장은 먼저 신(GOD)을 부른다. 신이시여,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거기에 계셨으니, 이 어리고 두려워하는 마리우스에게 휴식을 주시고, 축복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자신은 늙었으니, 자기 대신에 마리우스를 집으로 인도해달라 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해당 기도문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기도가 여기서 끝나버렸으면, 이 기도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왜냐? 만약 장발장이 그저 기도만 하고, 죽어가는 마리우스를 내버려두고 갔다면, 마리우스는 죽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마리우스를 살린 것은, 그가 하늘에 올린 기도가 아니라,
기꺼이 마리우스를 들쳐메고 하수구에 기어들어가는 장발장의 행동이었다.
하수구에 들어간 장발장은 온몸에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썼다. 지금도 하수구는 똥으로 더러운데, 19세기 프랑스의 하수구는 지금의 하수구보다 훨씬 더 더러웠을 것이다. 아마 상상 그 이상의 더러움과 오물, 똥 등 갖가지 더러운 것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더러운 곳에 들어갔기에 마리우스는 살아났다. 마리우스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그 더러운 하수구로 들어간 장발장의 행동을 통해 마리우스는 살수 있었다.
장발장은 그의 말 뿐인 기도가 아닌, 그의 행동으로 그의 기도를 이루었다. 기꺼이 그를 들쳐메고 하수구에 들어가는 그 행동.
행동은 중요하다. 행동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도를 성취한다.
[내가 배가 고플 때]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내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 주었소.
정말 고맙소.
내가 감옥에 갖혔을 때
당신은 조용히 교회 안으로 들어가
내 석방을 위해 기도해 주었소.
정말 잘한 일이오.
내가 몸에 걸칠 옷 하나 없을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내 외모에 대해 도덕적인 논쟁을 벌였소.
그래서 내 옷차림이 달라진 게 뭐요?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무릎 꿇고 앉아 신에게
당신과 당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소.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했소.
내가 집이 없을 때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집에 머물라고
내게 충고를 했소.
난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 주기를 원했소.
내가 외로웠을 때
당신은 날 위해 기도하려고
내 곁을 떠났소.
왜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소?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신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
하지만 난 아직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소.
당신은 그걸 알고 있소?
해당 시는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무명의 저자가 쓴 이 시는, 자신이 외롭고 배고프고 힘들 때, 정작 당신은 기도를 하기 위해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말한다.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나의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교회에서 기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배고프고, 춥고, 외롭고,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하늘에 퍼지는 허망한 기도보다도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야고보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있다. 위에 적힌 시랑 거의 유사하게,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닌 행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2:14 내 형제들이여, 만일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겠습니까?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매일 먹을 양식도 없는데
2: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에게 “잘 가라.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라”고 말하며
육신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17 이와 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2:18 혹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습니다. 당신의 행함 없는 믿음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에게 나의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18절)
위의 시, [내가 배가 고플 때]라는 시의 내용처럼 야고보서의 2장 16절에도 '잘가라,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라'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장발장의 기도에 대입한다면, 장발장이 열심히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 난 후, 죽어가는 마리우스를 내버리고 간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2장 17절의 말 그대로, 이와 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 되버리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야고보서'
나는 교회를 수년간 다녔지만, 한번도 교회 설교에서 야고보서의 내용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야고보서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몰랐다. 사실, 교회 역사적으로도 바울이 직접 쓴 바울서신들은 기독교의 교리 기초를 다졌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외의 서신들은 바울서신의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야고보서'이다.
종교 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이렇게 폄하했다.
지푸라기 서신!!(the letter of straw)
야고보서는 마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고, 중요하지 않은 서신이란 의미이다. 왜 그는 로마서와 같은 서신보다 야고보서를 등한시 했을까? 이를 위해서는 루터가 살던 당시,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을 간단하게 알아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세계사 시간에 배운만큼 대략적인 내용은 알것이다. 사기만 한다면 죄가 사라져 천국에 간다는 '면죄부'를 파는 로마 가톨릭의 부정부패를 보고 참다 못한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고, 이것이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조금 더 요약하자면, 교황과 로마 가톨릭의 부정부패가 종교 개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당시 로마 가톨릭에서 구원에 이르는 방식은 '행위'였다. 넓게 본다면 '면죄부를 사는 것' 또한 '산다(buy)'라는 행위이다. 사는 행위가 구원으로 이끄는 셈이다. 면죄부를 사는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성지순례'를 떠나는 전통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 또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위해 맨 처음에 시작되었다. 그들이 성스러이 여기는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한, 그 도시에 가본다는 것은 그들에겐 너무나도 꿈에 그리는 일생일대의 소망이었다. 마치 이슬람교도들이 평생에 적어도 한번은 메카에 가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루살렘만 성지순례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순례길로써, 12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가 매장되었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걸어가는 순례길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직접 걸어가며 자신의 신앙을 다졌을 것이다.
이러한 성지순례 또한, '걷다(walk)'라는 행위이다. 그외에도 그당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행위'로서 이루려고 노력했다.
수도승들은 자신의 등을 채찍으로 직접 때리는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고,
왕과 귀족들, 성당은 성물을 소유한다는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축복을 바랐다. 그리고 일반 신자들 또한 이러한 성물을 보기 위해 성당에 몰려들었다. 그들 또한 성물을 보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바랬던 것이다.
카톨릭의 미사 의식은 어떤가. 빵과 포도주를 같이 나누어먹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미사는 이루어진다.
수도승들은 금욕, 금식 등과같은 행위를 통하여 수행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행위의 원래 의미는 사라지고, 행위 자체가 중요하게 되어버렸다. 수도승들은 성물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했고, 순례길은 장사치들로 가득해져버렸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정점을 찍은 것이 '면죄부' 사건이었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는 분노한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행위'에 있는것이 아니다! 순례를 떠나고, 성물을 가지고, 면죄부를 사는 것! 이런 것들은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
라고 분노에 차서 95개조의 반박문을 적은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성물이나, 성지 등이 아닌 다시 성경으로 눈을 돌렸다.
기록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
그는 로마서에 이 구절을 발견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성유물이나, 성지순례, 금식과 고행 등과 같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향후 개신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믿음'이 아닌,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 등은 루터로부터 지푸라기 서신, 이라고 욕을 먹은 것이다. 일단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부터가 야고보의 무덤이 목적지인 순례길이 아닌가!
믿음의 타락?
사람들은 루터에 열광했다. 여태껏 로마 교황청의 횡포에 신물이 났던 이들은 개신교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개신교에서는 다시 문제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아니, 애초에 믿음이 증명될 수가 있을까? 누군가가 말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피아를 다룬 '대부1'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주인공 마이클 꼴리오네가 대부로서 세례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세례식을 거행하는 주교는 마이클에게 '당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마이클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주교는 다시 사도신경을 외운 후에 묻는다.
마이클, 당신은 사탄을 끊어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들은 정반대의 의미이다. 그는 말로는 사탄을 끊어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뉴욕의 마피아 대부로서 자신의 정적들을 찾아가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다. 가장 성스러워야 하는 순간에, 사실 가장 악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의 고백은 그 어느때보다도 신실하지만, 그의 행동은 그 어느때보다도 악하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은 검증될 수 없다. 그 믿음의 고백을 듣는 상대는 믿음으로 그 고백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믿음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고 이러한 한계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되었다.
'키르케고르'의 야고보서
19세기 덴마크 역시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덴마크의 국교는 개신교였다. 그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전 국민이 개신교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덴마크 국교회에 반대한 이가 있었으니...
쇠렌 키르케고르. 그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루터의 가르침이 오히려 개신교의 타락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했다.
세례를 받는다고 뿅!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노력이 수반된 아주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아닌, 실천으로 완성되고, 그 실천은 평생에 걸쳐 수양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제일 좋아한 성경은 이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이다.
아, 허망한 사람이여! 당신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압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야고보서 2장 20-21절)
해당 구절은 앞서 루터가 주장한 로마서 1장 17절과 마치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는 분명,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야고보서에는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라고 적혀있다.
서로 반대인 개념처럼 보여서 이 둘은 서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야고보서를 중요하게 여겼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인가? 이 지점에 대해 더 깊게 들어가기보단 지금은 다시 앞서 말한 장발장의 기도로 돌아가보겠다.
장발장의 기도: 믿음이냐? 행동이냐?
장발장의 해당 기도는 타인을 위해 기도한다는 점에서 교회에서 말하는 중보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장발장 본인이 아닌, '마리우스'를 위해 한 기도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음...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구절처럼 행동하는것이 중요하단 말인가? 믿음 < 행위 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우린 다시 중세 유럽인들로 돌아가고 만다. 믿음은 사라지고 오직 행위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로마서의 말처럼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다시 19세기 덴마크 국교회처럼 '세례'만 받으면 장땡이란 생각으로 빠지게 된다.
내 생각에 장발장의 기도, 그리고 그의 행동, 이것 두개 다 중요하고 같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장발장의 기도는 마리우스를 직접 살리는 행동을 할 용기를 장발장에게 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기도가 행동할 수 있도록 씨를 뿌른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발장의 행위, 직접 마리우스를 어깨에 메고 하수구로 들어가는 행위가 마리우스를 살린 것이다.
믿음이 믿음에서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절반만 이루어진 기도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믿음이 없는 행위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돈이나, 명예 등을 쫓게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믿음과 행동, 둘다 중요하다.
굳이 두 개의 역할을 나누자면, 믿음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고, 행동은 직접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어디로 가야할지 알더라도 직접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고, 길을 걷더라도 방향을 모른다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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