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린느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남들과는 달랐다.
그는 천재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 후각은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였다.
작중에는 그가 어떻게 단어를 배우는지 설명이 나오는데 그는 사물의 향기를 온몸으로 맡고,
그 후에 비로소 그는 사물의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무의 향기를 맡고, 온몸으로 이를 체험한 후에 비로소 '나무'라는 단어를 배운다.
그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은 실체하는 냄새가 없는, '사랑', '영혼' 등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다.
이런 점을 본다면, 주인공 그르누이는 우리가 어휘를 배우는 방식과 굉장히 다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우리도 비슷한 실상이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서 '나무'라는 단어를 배운다.
그르누이는 '후각'을 통해서 '나무'라는 단어를 배운다. 주로 쓰는 감각 기관만 다를 뿐,
우리가 단어를 배우는 방식 또한 그르누이랑 흡사하다.
하지만 우린 그르누이와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단어들 또한 학습이 가능하다. 아니, 적어도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무, 사과 등의 사물들은 우리가 단어로 이해하기 쉽다. 그것들은 실체가 있으며 또한 명확한 사물이다.
하지만 몇몇의 단어들은 그렇지 못한다. 사랑, 믿음, 소망, 거룩, 신... 등과 같은 단어들은 그 실체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단어들이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 평신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들은 교회에서 굉장히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신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등과 같은 문장들은 교회를 다니다보면 너무나도 많이 듣는 문장들이다.
하지만 우린 '신'을 실제로 본적이 없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물어보면 명쾌하게 말하지 못한다. 성령 또한 마찬가지.
'성령을 구해야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우린 성령을 본적도 느낀적도 없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믿겨지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
우리는 '단어'라고 하는 그릇 안에서만 해당 단어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어떠한 사물이 가진 의미가 단어가 감당할 수 있는 의미보다 크다면... 과연 그 사물은 그 단어로 불릴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라는 결론이다.
'신(GOD)'이 더 클까? 아니면 '신'이라는 '단어'가 더 클까? 이 둘을 비교한다면 '신'이 더 큰 개념일것이다.
신(GOD)은 '신'이라는 단어가 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다. 하지만 모세가 당신을 무엇이라 일컬어야 합니까, 라고 묻자,
신은 성경을 통틀어서 자기소개를 딱 한번 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that I am) (출애굽기 3장 14절)
이게 뭔 말장난 같은 소리?? 영어로 하면 더 이상하다.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내가 나지, 뭔소리야? 굉장히 말장난 같은 말이다. 당연히 나는 나이지 않는가. 하지만 신도 모세의 질문에 참 난처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 왈,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 라고 말하는데, 만약 신이 스스로를,
'나는 신이다'라고 말한다면, '신'이라는 단어의 그릇에 신은 갇히게 된다. 하지만 신은 '단어'보다도 더 큰 존재이기에 이렇게 밖에 자기소개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이다'
그래도 만약 신이 스스로를 '나는 신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신이 있었다. 성경에는 흔히 '바알'로 불린다. 우린 이 '바알'을 '악마', 혹은 '사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배웠으니까. 수많은 매체에서 '바알'은 마치 뿔달리고 사악한 계략을 쓰는 '악마'처럼 묘사된다. 혹은 적대시되는 '우상'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당시 사람들에게 '바알'의 뜻은 '신'이란 의미이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는 바알을 믿습니다'는 교회에서 말하는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만약 모세가 물었을 때, 신이 스스로를, "나는 신이다"라고 대답했다면, "나는 바알이다"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당시 가나안에 살던 이들에게 '바알=주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실체가 없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인가?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는 대상인데, 어떻게 그것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심지어 단어 보다도 더 큰 존재인 신을 어떻게 단어라는 그릇 안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굉장히 많은 의문점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신은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는 말장난 같은 말로 자신을 소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단어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신'이라는 존재는 단어의 영역을 벗어난 상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 '침묵'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말년 작품인 '푸른 강'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미쓰코가 대학교 시절 만났던 남학생 오쓰가 신부가 된 후, 다시 만나서 둘이 나누는 대화이다.
"근데 그 신이라는 말 좀 그만해줄래요? 짜증이 나고 실감도 안나요. 나한텐 실체가 없단 말이에요.
대학때부터 외국인 신부들이 쓰던 그 신이라는 단어와는 인연이 멀었어요."
"미안합니다. 그 단어가 싫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토마토건 양파건 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한테 양파란 뭔가요?" (푸른 강 '엔도 슈사쿠' 94p)
'신'이라는 거창해보이는 어휘에서 순식간에 어휘가 친근해졌다. 양파라니. 마침 이 대화는 미쓰코와 오쓰가 양파 스프를 먹으며 나눈 대화였다. 만약 그들이 양송이스프를 먹고 있었다면 아마 신은 졸지에 양파가 아닌, 양송이가 되었을 것이다. '신'이란 단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 둘의 대화에서 오쓰는 '양파란 무한한 부드러움과 사랑의 덩어리'라고 말한다.
음.... 신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어라 설명하자면,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루세 씨는 일본인이니까 예수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경원하실 테지요.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세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닭살 돋고 어색하다면, 생명의 따스함이라도 좋아요, 그렇게 부르세요.
그게 싫으면 늘 하던 대로 양파라도 좋아요.
예수, 혹은 하나님, 신, 이라는 단어가 오글거리고 싫다면 '사랑'으로 바꿔 불러봐도 좋다고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는 '신'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꾸어 불러보자.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실체가 없는 단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세상은 온통 '냄새'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사랑'과 같은 단어는 냄새가 없었다. 그러니 그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향수를 만들어내어 사랑을 흉내내고, 사랑을 모방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일시적인 사랑이었고, 오히려 역효과만 만들어낼 뿐이었다. 사랑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가 만든 향수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그가 맡은 '완벽한 향수'의 온전한 향을 맡자 사람들은 그르누이를 죽였으며 먹어치워버린다. 결국 그르누이는 자기파괴적이고, 스스로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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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누이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 스스로 아무런 그는 '사랑'을 모방했을 뿐이고, 그 결과 최악의 결과인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사실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르누이에게 '사랑'이란 말할 수 없는 것, 그의 인지영역 밖의 것이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깊은 상호 인격적인 애정에서 단순한 즐거움까지를 아울러서 강하며 긍정적으로 경험된 감정적 정신적 상태'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떠어떠한 정신적 상태'이다. 조금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것은 호르몬의 작용에 대한 결과인 셈이다. 따라서 사전적 정의만 본다면 사랑은 뇌의 여러 호르몬의 작용이다.
하지만 사랑이 호르몬의 작용에 머무른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다시 우린 양파로 돌아간다. 양파란 무한한 사랑의 덩어리라고 말하던 오쓰의 말처럼. 사랑은 단순한 호르몬 작용의 너머의 거대한 의미이다.
하지만, 사랑을 '사랑'이란 단어로 설명한다면 사랑은 '사랑'이란 단어의 감옥에 갇혀버리게 된다.
말씀(성경 구절) 또한 언어의 영역 너머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일반 책과 다른 이유는 언어라는 영역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인간이 인지하고, 읽어야 하기 때문에 '언어'라는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그 실체는 언어보다도 더 큰 영역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실 말씀은 언어보다도 더 큰 개념인 것이다. 그 큰 개념을 '언어'라는 그릇에 꾸역꾸역 담다 보니까 잘못 읽으면 성경은 죽은 신화가 되곤 한다. 2000년전에 끝난, 나와 상관없는 한 사건이 된다.
교회에서 간증문들이 다 비슷한 구조로 흘러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간증문들은 사례들만 다르고, 사실상 흘러가는 과정은 비슷하다. 본인이 어떠한 사건을 겪었는데,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간증을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때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간증도 많다. 뭔가 중간 과정이 많이 생략되었는데? 라는 의문이 드는 간증도 많다. 하지만 그들도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은 은혜란 '언어'라는 그릇에 담기에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논리와 이성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그것보다 더 큰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반인이 보았을 때엔 허튼소리, 개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소리. 하지만 그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또한 제자들에게 논리가 아닌, 행동과 실천, 그리고 비유와 우화로 설명할 뿐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 그것은 외로운 싸움이다.
어려운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쉬웠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사랑'이라고 하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의 사명이었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침묵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불쌍이 여기소서, 울부짓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침묵할 수 있을까. 그는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말한단 말이냐. 그가 말하는 순간, 제자들은 그의 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는 순간 그 본 의미가 사라지는데.... 고민이 깊고 외로운 싸움이었을 것이다.
왜 교회에선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의 의미를 설명하는가?
이것에 대한 답변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구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그 본래적 의미가 아니라 한국어라는 언어를 통해 걸러진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면 우리는 해당 구절의 원래 의도를 곡해하곤 한다. 그래서 최대한 원작자의 의도에 맞추어 해당 구절을 해석하다보니 목사님들은 히브리어, 헬라어의 원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원어도 그 본래적 의미를 다 담지는 못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또한 인간의 언어라는 어쩔 수 없는 그릇의 한계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들을 우린 제대로 알고 있는가?
사랑, 소망, 믿음... 등의 단어들은 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단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은 '단어'라는 그릇에 담기기에는 그 개념들이 너무나 크다. 그러니 우린 먼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고 인정해야한다. 이 인정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는 포장지가 씌여진 '사랑'이 아닌 것에 속게 되고, '신'이라는 가면을 쓴 '신'이 아닌 것에 홀리게 된다.
우리의 인지 영역 너머에,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범위 너머에, 단어라는 그릇 너머에도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것은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며, '나는 모른다'라고 겸손히 나아가는 것이다.
겸손히 나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시선에 갇혀있지 않고, 우리의 시선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이전에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고 인정을 하는 선행 과정이 있어야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마음 편했다. 그는 그냥 침묵하고 무시해버려라, 라고 말하면 끝이니까.
물론 그렇게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다. 우린 평생 사랑을 모르고, 아니, 사랑을 모른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 아무 일도, 아무런 지장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사랑을 알고 살고 싶다'는 소망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거기서부턴 어찌할 수 없다. 사람 각 개개인에게는 각자의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언어 영역 너머의 것들을 안다는 것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다.
내가 사랑을 알고, 신을 알고, 은혜를 알고... 비록 이렇게 말하는 순간, '사랑', '신', '은혜'라는 단어의 감옥에 갇혀버리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에 대해선 나중에 차차 하나씩 다뤄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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