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디아나 존스3: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렁비니 2024. 2. 14. 15:50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명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그중 존스가 아버지와 함께 성배를 찾으러 가는 3편은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일컬어진다. 존스는 수많은 난관을 뚫고 마침내 성배가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곳에 도착하고, 3개의 최종 관문을 통과한다. 첫번째 관문와 두번째 관문을 아버지의 노트에 담긴 힌트를 사용해 무사히 돌파한 인디아나 존스는 드디어 마지막 관문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는 전혀 뜻밖의 관문을 마주한다. 이전의 두 관문은 어떻게 어떻게 돌파할 방법이 조금이라도 보였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마주한 것은 그저 낭떠러지이다.
그 낭떠러지 앞에는 어떠한 요행도 보이지 않았고,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뿐이었다.

성배를 찾기 위한 마지막 관문. 그 앞은 길이 끊어진 낭떠러지와 같다.

인디아나 존스의 아버지는 현재 나치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이전 두 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적은 노트를 펼쳐보지만, 거기에도 아무런 힌트는 없다. 
그저 '사자의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리라'라고만 적혀있다.

아버지의 노트. '사자의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리라'

 

Leap of Faith(믿음의 도약)

 
이것이 이 함정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 함정을 지날 때에는 앞선 두 함정과는 다르게 그 어떠한 요행도 바랄 수 없다. 사자 조각상 앞에 선 인디아나 존스는 단 두가지 선택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뛰어내리는 것', '뛰어내리지 않는 것'.


두려움

바로 여기서 인디아나 존스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해보자. 그는 뛰어내리거나, 뛰어내리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뛰어내리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뛰어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뛰어내릴 수 없다. 그가 뛰어내린다면 죽게되기 때문이다. 

나는 뛰어내려야만 한다.
그런데 뛰어내리면 난 죽는다.
난 못 뛰겠어. 하지만 뛰어야 해....

 
인디아나 존스의 이성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는 발을 내딛으면 죽게 된다. 하지만, 그는 뛰어내려야만 한다.
인디아나 존스가 아닌 다른 그 누구도 이 함정을 대신 건너줄 수 없다. 그는 홀로, 이 함정을 마주하고, 이 함정을 풀어야만 한다.
인디아나 존스는 굉장히 두렵다. 그의 머리로는 이해되지도 않고,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이 순간이 그에겐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항상 '두려움'과 함께 따라온다. 우린 말로는 쉽게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믿음이 시험에 드는 그 순간에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만 남을 뿐이고, 이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따르지 않을 것인가?
 

아브라함의 침묵

인디아나 존스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던 인물이 있다. 그는 '아브라함'.
행복하게 자신의 아들과 잘 살고 있던 아브라함은 어느날, 한 음성을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외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아브라함은 아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니. 여호와가 인신제사를 드리란 것인가? 인신제사는 윤리적 관점에서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흉측하고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분명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음성은 분명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고 있단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음성은 이삭을 바치라고 말한다.
왜 이런 잔인한 시험을 이 음성을 주시는 것이지? 어쩌면 이 음성은 여호와의 음성이 아니라 사악한 악마의 음성이 아닐까?

카라바조가 그린 '이삭의 희생'. 그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눈빛을 단호하게 그렸지만, 과연 실제로 아브라함은 결연한 의지로 이삭을 바칠 수 있었을까?

 
만약 이러한 고민을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 털어놓았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아브라함은 노망난 노인이란 소리를 듣고 쫓겨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아브라함 스스로 조차도 이 음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음성엔 아무런 실증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고민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 음성은 이해를 바랄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비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의문을 가지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이 명령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잔인한 일을 시킬 수 있는가? 맞다. 그의 명령은 우리의 이성과 도덕 기준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보아도 바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것은 아즈텍 제사장들이나 하는 일이다. 게다가 이삭은 그냥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100살 때 얻은 유일한 사랑하는 외아들이다.

아브라함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하인 두 사람과 그 아들 이삭을 준비시켰습니다.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한 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 22장 3-4절)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하인 두 사람은 3일 동안 번제를 드릴 모리아 산을 향해 걸어갔다. 이 2박 3일 동안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그리고 그 3일의 시간동안 언제라도 그는 나귀의 방향을 돌려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왜 돌아왔냐는 아내 사라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로 사건을 간단한 해프닝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래왔듯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과 잘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3일 동안 모리아 산을 향해 걸어갔다. 수많은 생각과 의심이 아브라함의 머릿속을 지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아브라함 일행은 모리아산에 도착했고, 그는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지막 선택만이 남았다. 아브라함은 여태껏 3일간 걸어오며 어떤 결론을 냈을까? 그다음 구절을 보면 그의 결론을 엿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

너희는 나귀를 데리고 여기 있으라.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한 다음, 너희에게 함께 돌아오겠다.
(창세기 22장 5절)

 
아마 아브라함은 앞서 들었던 그 음성, 창세기 22장 2절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귀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가지를 더 믿었다. 바로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점.
그는 번제로 이삭을 드리기 위해 이삭을 포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 말했다는 점에서 이삭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믿던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었고, 자신의 작은 머리로는 비록 그 방법을 모르지만,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 라고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여전히 사랑했고,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삭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창세기 11장 8절)

 
이러한 아브라함에 관해서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체념의 무한한 운동을 하여 이삭을 버린다. 이것은 사사로운 기도(企圖: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후에 그는 모든 순간에 믿음의 운동을 한다. 이것이 그의 위안이다. 즉 그는 말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만일 일어 난다고 해도, 주께서는 부조리한 것의 힘을 빌어서 새로운 이삭을 나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키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중)

 

두려움
이삭을 죽여야 한다... 이삭은 내 삶의 전부. 그리고 이것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외로운 싸움.혹시나 이 음성이 하나님이 아닌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 등등. 수많은 두려움들

vs

하나님의 명령
이삭을 바쳐라.

그는 두려움 가운데 수많은 의심이 들었으나, 끝내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고, 믿음으로 온전히 돌려받았다.

무한한 포기(신의 뜻에 따라 완전히 포기) + 신앙 (모든 것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교회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이라고 말하며 그의 믿음이 대단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이삭을 바쳤을 것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 아브라함은 엄청 걱정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에겐 단 두가지 선택, 이삭을 바치거나/바치지 않거나 라는 선택만이 있었고, 그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삭을 바치기를 선택했다. 

다시 '카라바조'가 그린 '이삭의 희생. 그가 그린 아브라함은 천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바치려 한다. 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수많은 의심과 두려움 가운데도 불구하고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닐까?

 
믿음의 단호한 결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결코 두려움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다닌다고해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 수 없다. 우린 여전히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것은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기로 한 결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빌립보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립보서 2장 12절)

 
평안하게 아무런 두려움과 의심 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그 모든 두려움과 의심 가운데도 하나님을 따르는 것.
그 둘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믿음이 크다고 할 수 있을까?
 

인디아나 존스의 결단

성배를 얻기 위해 마지막 관문 앞에 선 인디아나 존스.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앞엔 단 두가지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뛰어내리지 않거나'. 여기서 절반만 뛰어내린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앞선 관문들과는 다르게 그 어떠한 편법도 없고, 그를 대신해 뛰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아나 존스는 발을 내딛는다.
그 수많은 의심과 두려움을 뚫고 뛰어내리기로 선택한 것이다. 

심장이 터질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인디아나 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발을 내딛는다.
발을 내딛고 난 후, 인디아나 존스는 착시현상에 가려져 숨겨진 길을 발견한다.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알고보니 착시현상 때문에 절벽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길이 있었던 셈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찾은 것처럼, 인디아나 존스는 믿음으로 성배를 얻고, 아버지 또한 구하게 된다. 그는 체념의 무한한 운동을 하여 발을 내딛었고, 모든 것을 되돌려받았다. 
 

인디아나 존스 3편의 마지막 관문. '믿음의 도약' 장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디아나 존스는 두려움 가운데 발을 내딛었단 점이다. 또한 '성배를 얻기 위해서', 혹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낭떠러지에 자신의 몸을 맡긴 것이 아니었다. 이 발걸음은 성배나 아버지.. 혹은 다른 목적을 위하여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믿음'때문이었다. 두렵고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으로 걸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