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
분명 이 구절에는 '용서'와 '관용'이라는 굉장히 큰 가치가 내재되어있다. 하지만 진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인가?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당 구절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사랑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일까?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는 하지만, 실상 사랑 비슷한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에는 앞선 마태복음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구절이 있다.
네 원수가 굶주려 있으면 먹이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어라.
이로써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이다.
(로마서 12장 20절)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역사'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가 실상 그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원수를 골려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원수는 용서를 받음으로, 그들은 수치심을 느낀다. 따라서 때에 따라 용서는 최고의 조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명령에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사랑인지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는 사랑은 사랑받는 상대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정은 '친구'라는 사랑받는 상대를 통해 드러난다. 연인간의 사랑은 '연인'이라는 상대를 통해 그 사랑이 드러난다. 애국심은 '조국'이라는 상대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경우는 다르다. 그것은 겉으로 알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실은 그를 골려주는 위장된 형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표징도 찾아볼 수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사랑인지 사랑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신뢰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표징을 찾고자 한다. 선물을 준다던가, 달콤한 말을 한다던가...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엔 아무런 표징이 없다고 말한다. 표징이 없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신뢰하는 최대의 신뢰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을 통해서만이다.
결론
마태복음 5장 44절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우리가 나름대로 우리의 힘으로 원수를 사랑하려해도, 그를 사랑하는 행위가 숯불을 얹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실족하게 된다. 하지만 실족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다.
그분 안에서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기독교의 첫째 계명은 이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장 35-36절)
원수를 사랑하는 것 또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두번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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