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지난 수백년동안 다양성을 가진 수많은 문화, 가치관들을 짓밟아왔다고 몇몇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로 잉카, 아즈텍 문명은 기독교도들인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멸망되었고,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 또한 기독교도인 서양 백인들에 의해 무참히 탄압되었다. 그들은 강제로 개종당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는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실제로 다양성을 짓밟아온 종교일까?
종교의 다양성: 이집트 콥트 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
문화의 발전 과정은 흔히 생각하는 흑백논리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종교도 크게 본다면 문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해당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훨씬 더 다채로운 문화가 생겨나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에만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집트에는 꽤 많은 기독교도인들이 살고 있다. 대략 이집트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그들은 콥트 정교회라고 불린다. 전승에 따르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사역을 다니던 마가는 이집트로 가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에는 성 마가 교회가 세워지고, 콥트 정교회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슬람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서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지만 수백년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왔다. 그리고 그 박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교회에 대한 방화, 해킹, 살인까지 다양한 방식의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5년 2월 15일, ISIL대원들은 리비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던 이집트 콥트교도인들 21명을 살해했다. 그들은 그들의 죽음에 대해 피의 보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콥트교의 주교와 총주교 교황들은 용서와 관용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매번 되새기며 보복을 금지했다. 대신 그들은 '리비아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며 추모의 의미로 사람들은 '엘 아우르 순교자 교회'를 세웠다. 탄압과 박해, 그리고 순교가 오히려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기독교라니. 그들은 기독교의 불모지라고 불리우는 중동에서 수많은 박해를 견디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켰다. 이것이야말로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예시는 이집트만이 아니다.
에티오피아에도 굉장히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솔로몬을 찾아간 시바 여왕(열왕기상 10장 1-3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에티오피아 총 인구의 43%가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믿는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오리엔트 정교회에서 비롯된 종파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있어 종교사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종파이기도 하다.
아직 그리스도교가 초창기일 때, 사도행전 8장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한 에티오피아 내시가 등장한다.
27: 그래서 빌립이 일어나 가다가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고위 관리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28: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 예언자 이사야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29: 그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저 마차로 가까이 다가가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그에게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중략)
35: 그러자 빌립이 그의 입을 열어 바로 그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해서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27-35)
이 에티오피아 내시는 지금으로 치면 재정부 장관이나 차관으로, 그가 개종한 시기는 놀랍게도 아직 사도 바울이 개종하기도 전이었다. 그에 대한 뒷이야기는 더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39절을 보면 그는 매우 기뻐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에티오피아가 기독교화가 되는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일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에티오피아에 있던 악숨 제국은 서기 3세기 경, 기독교를 국교화한다. 로마 제국과 비슷한 시기인 것이다.
아마 가장 유명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건축물이라고 하면 '랄리벨라 암굴 교회'일 것이다. 12세기 자그웨 왕조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성궤가 보관되어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총 11개의 암굴교회가 있으며 위 사진은 그중 가장 유명한 성 게오르기우스(용을 무찔렀다는 기독교의 성인)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예시들은 오히려 기독교가 문화의 다양성을 짓밟은 것이 아닌,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사례가 된다. 사실 기독교는 문화의 다양성을 짓밟으려고 하지 않았다. 서기 7세기, 로마는 기독교화되었지만 다른 문명(게르만, 바이킹 등)들은 아직 개종하기 이전이었다. 교황은 그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하면서도 그들의 신전을 가능한 한 파괴하지 말라고 명했다.
가능한 한 이교 신전을 파괴하지 마시오.
다만 그들의 우상만 파괴하고 거기에 성수를 뿌리고 제단을 만들어 유물을 신전 안에 설치하시오.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한 권고)
601년에도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가 영국의 선교사들에게 내린 훈시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가능한 한 이교도의 신전을 파괴하지 마시오. 다만 그들의 우상만 파괴하고 만일 그 신전이 잘 지어진 것이라면 악마에게 드리는 예배에서 신전을 떼 내 참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바꾸면 되오… 사람들은 악마를 숭배하기 때문에 가축을 잡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또 자신들의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물을 드린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오…”
(60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가 영국의 선교사들에게 내린 훈시)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는가?
이런 예시들을 본다면 기독교도들의 본래 목적은 성상을 파괴하고, 신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어쩌다가 기독교는 다양성을 무너뜨린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을까?
아마 제국주의 시절, 원주민들을 탄압하며 그들의 문화를 억압했기 때문일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동한 근원적 동기는 기독교가 아닌, "돈"때문이었다.
그들은 돈이 목적이었고, 종교는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명목상으로 붙는 용도였다. 애초에 신대륙을 발견하게된 계기부터가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 개척이었다. 인도로의 항로는 곧 떼돈을 벌수 있는 기회였다. 스페인 여왕은 그러한 기회를 얻고자 콜롬버스에게 투자를 했던 것이다.
코르테스와 같은 콩키스타도르들(아메리카로 진출한 스페인인) 또한 신대륙에서 얻을수 있는 부, 명예, 출세의 기회들이 목적이었다.
북미도 마찬가지. 초창기 이주민들은 종교적 탄압을 피해 도망쳐온 청교도인들이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미 서부로 세력을 뻗은 것은 골드러쉬가 시작된 후부터이다.
돈, 황금. 이것들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치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랑, 용서, 긍휼의 종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요한복음 13장 34절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치인 "이웃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새계명을 주었고,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먼저 몸소 실천하였다.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는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0) | 2024.05.19 |
---|---|
예수의 부활은 실제하였는가? (0) | 2024.05.17 |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읽는 방법 (1) | 2024.04.26 |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읽기 어려운 이유 (2) | 2024.04.24 |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1): 우리는 종교 없이도 잘 살지 않는가? (4) | 2024.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