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적 세계관 (헬라적 세계관) 에서의 운명
헬라, 즉, 그리스적 세계관에서는 운명이 굉장히 중요하다. 운명은 인간이 피할수없는 것이고, 심지어 신조차도 그 운명에 메여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운명의 여신들인 '모이라이'들은 제우스조차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들은 대단히 독보적인 존재이며, 심지어 신조차도 거역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운명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인 예. 그가 영웅인 이유는 운명의 장난에 농락당했으나, 결국 끝까지 그 운명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는 파멸을 알고있으면서도 진리를 찾기위해 싸웠다. 결국 운명이 꺽지 못한것은 오이디푸스, 인간의 의지이다. 이는 자연스레 인본주의로 이어진다. 신보다 인간의 의지, 지혜가 더 뛰어나다. 니체 등의 철학자가 이 계보를 따랐다.
정리해보자면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반항하는 인간이다. 이와 비슷한 개념이 까뮈가 말한 시시포스적 인간이다.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돌을 굴려 올라가야만한다. 정상에 도달하면 돌은 다시 내려가고, 그는 또 돌을 굴려올린다. 그과정에서 아무런 의미는 없다. 돌을 굴려야하는 의미는 시시포스가 직접 만들어간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의 운명
반면 히브리적 세계관에서는 운명이 긍정적이다. 우리 인간이 이 운명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헬라적 세계관과 동일하다. 그러나 차이는, 이 운명이 부정적인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된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따른것은 이 운명에 순응한것이다. 오이디푸스와 정 반대의 길을 걸은것이다. 아브라함이 오이디푸스와 차이를 보인것은 아브라함은 운명에 순응하는것이 복이 될것이라 믿은것이다. 그는 이 운명이 어디로 자신을 인도할지 모르지만, 분명 자신을 복의 길로 인도할것이라 믿었다. 이해되지 않기에 그는 믿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 창세기 12장 1절 -
그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안락한 고향 땅을 떠났다. 성경에서 이것은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사실 축복이 아닐수도 있다. 그는 정든 고향, 사랑하는 친척, 가족들을 모두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서 기약없는 방랑생활을 하라는 말과 똑같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가 복의 근원이 될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두려움과 고난이다.
그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진채로 있었지만, 그는 떠났다.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절대자의 선하심을 믿었고, 그분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긍정했다. 어떤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제 조금 더 알기 쉽게, 아브라함과 오이디푸스를 표로 비교해보자.
아브라함 (히브리적 세계관) | 오이디푸스 (헬라적 세계관) | |
운명에 대한 인식 |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 |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 |
운명에 대한 긍정/부정 | 긍정적 | 부정적 |
운명에 대한 저항 정신 | 스스로 운명에 대해 순응함 | 운명에 대해 저항함. |
자신의 운명을 아는가? | 모름 --> 축복으로 이어짐 | 암 --> 저주로 이어짐 |
운명을 알아야 한다는 의지? | 별로 없음. | 꼭 알아야 함. |
아브라함이 만약 시시포스적 상황에 놓인다면, 그는 돌을 굴리도록 명령하는 어떠한 절대자에게 순종했을것이다. 정상에 도달한 순간, 돌이 다시 굴러떨어지는 불합리한 순간에 마주한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을 긍정한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적인 존재를 믿고, 그 존재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의미를 몰라도 돌을 끊임없이 굴릴수 있다. 그리고 절대 지치지 않는다.
시시포스는 스스로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것이 인간으로써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본다. 그들도 이러한 인간을 초인이라 부르지 않았나. 시시포스는 그러니 피곤하고 외롭다. 많은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외롭지 않다. 그가 혼자라고 생각할때마다 그는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절대자와 그가 맺은 언약을 떠올린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외롭지 않다.
원영적 사고
최근에 '원영적 사고'라는 사고방식이 유행한다고 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는 확고한 낙관론을 기반으로 두고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사고방식과 비슷한 면이 있다. 현재 내게 일어난 이 일이 현재의 순간에는 고난일지라도, 여호와께선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그 어떠한 부조리한 방식을 통해 이것을 축복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사고방식이다. 원영적 사고와 아브라함의 차이는, 원영적 사고에는 '나' 중심적이란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야. -장원영-
사실, 행운의 여신이 '나'의 편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나에게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원영적 사고의 가장 큰 차이이다.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복은 개인적 복으로 끝나는 복이 아니다. 여호와는 그에게 다수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 아브라함 개인의 복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원영적 사고방식 | 아브라함의 사고방식 | |
운명에 대한 인식 | 초긍정. 운명의 여신은 나의 편. | 고난과 부조리. |
중심이 되는 것 | '나' (self) | 민족. 집단적 사고방식. |
시간에 대한 관점 | '나'의 대에서 끝남. | '나'가 죽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짐 |
세상이 나의 편이라는 근거 | 딱히 없음. |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 |
원영적 사고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로 세상은 '나' 중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작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아기적 사고방식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아브라함의 사고방식은 훨씬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작고 연약하지만, 나와 함께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거대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는 타인을 이해하는 배려와 친절이 사라진다. 또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선 불가능하다. 우리 각자는 흠이 많고 불완전한 존재들이니, 불완전한 존재가 하는 사랑은 어디가 부족한 불완전한 사랑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원영적 사고방식은 '나'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한계가 존재한다.
나는 운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히브리적 세계관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운명을 거스를수 없다는것을 인정하고, 그 운명이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를 축복할것이라는 그런 사고방식. 이것이 하나님께 승복하는 과정이다. 당신께 순종하겠사오니 당신이 나를 이끌어주실것이라는 믿음으로 결단하는것이다.
또한 헬라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은 느끼게 된다. 돌을 굴리는것도 나,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것도 나,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돌을 굴리는 의미는 절대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 둘간에는 끊어지지 않는 언약이 있다. 그러니 그는 외롭지 않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 요한복음 14장 18절 -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인은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 (2) | 2024.07.05 |
---|---|
사랑과 효율성 (0) | 2024.06.21 |
기독교는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0) | 2024.05.19 |
예수의 부활은 실제하였는가? (0) | 2024.05.17 |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2): 기독교는 다양성을 짓밟지 않는가? (1) | 2024.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