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ranbinny.tistory.com/47
앞선 글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감사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적어보자.
앞선 글에선 '하나님께선 바깥 세상에서 고난을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고난'에 대한 특별한 접근법에 대해 설명하며,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것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여전히 의문이 들 것이다. 아마 이런 의문점일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느낀단 말이냐!
이것은 과학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전혀 설명이 불가능하다!
맞는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이성이 끝나는 바로 그 한계 지점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시기에 이성을 통해서도 설명가능하신 분이다.
한번 존 폴킹혼의 책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이성을 활용하여 하나님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보면, 왜 우리가 감사할 수 밖에 없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전 우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물리법칙과 수학
사실, 지구에서도 적용되는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이 안드로메다의 은하에 있는 한 행성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기이한 일이다. 빅뱅부터 약 130억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물리법칙과 수학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당장 내일부터 우리은하에는 적용되고, 안드로메다 은하에는 적용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또한 과학자로서 우리가 우주를 연구할 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는 열쇠로 수학을 사용한다는 것은 실은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수학은 순수한 사고입니다. 수학자들은 연구실에 앉아 머릿속으로 순수한 수학의 아름다운 형태들을 그립니다.(형태를 만들고 분석하는 것이 수학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들 중 가장 아름다운 형태들을 우리는 주변의 물리 구조에서 발견하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린 수학과 같은 내부의 합리성과 물리적 세계의 구조와 같은 외부의 합리성이 연결될 수 있을까요? 기억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매우 깊은 차원의 연결입니다. 세계는 어떻게 그 정도까지 이해가 가능한 것일까요?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49p.)
너무도 당연한 사실, 당연한 물리법칙들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 우주는 이런 우주로 탄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력방정식이 1분마다 변하는 그러한 혼돈의 우주로 탄생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주는 굉장히 정교한 미세조정값을 거쳐가며,
수학적으로 들어맞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절대로 흔한 일이 아니다.
증명될 수 없는 멀티버스 이론
폴킹혼은 '우주학'과 '진화생물학'이 두가지 과학 분야는 다른 과학분야와는 달리, 실험이 불가능한 분야라고 말한다.
멀티버스라는 '다중 우주론'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 증명될 수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실험해볼 여러가지의 우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블의 세계관에서는 가능한, 'What if...?'가 현실 우주 세계에선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상상력으로 이렇게 만들어내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멀티버스'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영역'이다. 현실 세계에서 '멀티버스'는 절대로 증명될 수 없는 이론의 영역에 머물수 밖에 없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진화생물학도 실험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라면 생물의 진화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우주'가 수학을 통해서 법칙이 발견된다는 점은 정말 놀라운 점이다. 사실 우주가 이렇게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극히 희박한 확률을 뚫어야만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의 우주들이 실제로 무수히, 무한하게 존재하고,
그중 한 우주가 우연히 생명체에 진화하기에 딱 맞는 조건을 갖춘것이 아닐까!
극히 희박한 확률이라도, 무한한 경우의 수가 있다면, 하나는 들어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중우주론은 절대로 증명 불가능한 영역이다. 따라서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라고 본다. 이렇게 '믿음'의 영역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멀티버스 우주론을 바라보는 것만큼, 어떠한 '창조주'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주를 만들었다는 '창조론'또한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기란 어려운 일이다.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하지만, 무한한 우주들이 나열되어있고, 그중 하나가 우연히 생명체가 탄생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게 되었다는 가설 1번과,
우주는 단 하나만 존재하며, 이 우주는 생명체를 위해 섬세하게 조율되었고, 창조주가 의도하여 피조물로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가설 2번.
이 두가지 가설은 '과학'이 알아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영역이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따져보자.
1번 가설을 믿는 경우,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단지 유신론을 위협으로 느끼는 몇몇 이들을 안심시켜주는 것 뿐이다.
따라서 2번 가설, 어떠한 '창조주'가 의도를 가지고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 볼 수 있다.
이 말은 무신론자들이 어리석다, 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유신론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으며, 지적으로도, 훨씬 더 만족스럽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증명'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순수하게 논리로, 이성으로 증명될 수 없다. 누군가가 당신의 친구임을 '증명'해보라. 왜 사랑이 증오보다 낫고, 용서와 관용이 복수보다 나은지 증명해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지점에 대해서 존 레슬리(캐나다의 철학자)는 사형수에 관한 비유를 한다.
당신은 곧 사형을 당할 사형수이다. 눈을 가린채, 말뚝에 묶여 있다. 그리고 10명의 사수가 당신을 겨누고, 발포 명령을 내리고 사격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당신은 살아있다. 어찌된 일일까? 그저 어깨를 으쓱하군, “흠, 이렇게 됐네. 하마터면 맞을 뻔 했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당신이 죽지 않았는지 알고자 할 것이다. 여기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연히 모든 사수가 빗맞혔을 경우. 나머지 하나는 당신의 인식 범위 이상의 무언가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 사수가 사실 당신편이라던가…
그렇다. 천문학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음, 아무일도 없었군'하고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은... 뭔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양자역학
덴마크의 신학자, 키르케고르는 '어떤 것의 소중함을 알려고 한다면,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아라'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 그 자체로 우주를 만드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우주는 굉장히 정교하게 조율된 다양한 물리법칙과 수학을 통하여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때때로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어떠한 방정식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수많은 학자들의 투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정식은 '오일러의 방정식'이다. 해당 방정식이 왜 아름다운지는 아마 이런 이과 유튜버들이 잘 설명을 해줄 것이다.
세계는 이러한 수학적 법칙과 조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렇지 않은 대체 우주에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충분히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신 분이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양자역학'에서 언급하는 미시세계의 우주를 언급해야만 한다.
양자역학은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양자사건의 결과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자는 여기 혹은 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발견을 확률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자를 찾으려 하는 특정 경우 전자가 실제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근본적 무작위성은 양자 세계를 예측 불가능하고 기계적이지 않은 세계로 만듭니다. 하지만 많은 양자 입자의 운동을 모으면 이러한 변화와 불확실성이 서로 생쇄되면서 상당히 믿을 만한, 전반적인 운동의 패턴이 형성됩니다.
이는 마치 생명보험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합니다. 보험회사는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저 당신과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이 수년 내에 죽을 확률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보험회사가 충분히 많은 이들에게 보험료를 받으면, 회사는 이런 확률을 통해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개인 간에는 차이가 있음에도 충분히 큰 집단의 행동 패턴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102p.)
미시세계의 우주를 살펴보면, 우리가 있는 거시 세계의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당연하다는 시실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분명히 하나님께선 제멋대로인 우주를 창조하실수도 있으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또한, 하나님께선 한번 창조를 하시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너무나 완벽하게 돌아가서 창조주가 없어도 그가 만든 여러가지 법칙들(물리법칙이나 수학 법칙 등)만 있어도 유지되는 우주를 만드시지도 않았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질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우주이다. 우주는 이 양 극단 사이에서 정교하고 바른 길을 찾는다.
하나님은 우주를 그분의 인형극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창조주가 인형극을 하듯 일일이 줄을 잡아당겨서 그분이 조절하는대로 모든 피조물이 춤을 추는 것일까? 사랑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주의 폭군일 수 없다.
반면, 하나님은 무심한 관객도 아니다. 그분은 우주를 잘 설계하고 난 뒤,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우리 우주는 이 양 극단 사이에서 정교한 바른 길을 찾는다. 우주 역사는 변경이 불가능한, 가차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장이 아니다. 지속적인 창조 과정에는 창조물들이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렇기에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우연’이 일어난다.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존 폴킹혼- 80p.)
하나님의 우주 창조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사유가 뒤따른다.
사유 내용 | 결과 | |
1. | 창조주가 합리적이고 신실하신 분이다. | 세계가 예측 가능하고 질서정연할 것임을 기대한다. |
2. | 창조주는 자유로운 분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어떤 우주든 자유롭게 만들어내실수 있으시다. | 그렇기에 우리는 앉아서 사유하면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찰하고 실험해가며 이 창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 |
3. |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 따라서 이는 충분히 깊게 연구할 가치가 있다. |
4. | 창조세계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 따라서 우리는 창조세계를 충분히 찔러보고 연구할 수 있다. 이것은 불경한 행위가 아니다. |
이 4가지의 사유를 바탕으로, 과학이 발전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합리적이고, 신실하시며, 자유하시며, 또한 동시에 굉장히 정교한 법칙들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감사할 만한 일이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
게르만 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성 보나파키우스
서기 8세기 경, 성 보나파키우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게에 독일의 선교사로 임명받아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그 지역의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이어나갔다. 독일의 중서부 지역인 '헤센 주'에서 사역을 할 때, 거기에는 이교도들이 섬기는 큰 참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게르만족들은 그 참나무가 '번개의 신' 토르의 지성소라고 생각해서 참나무를 예배했다. 하지만, 보나파키우스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참나무를 베어버렸고, 이교도들은 그가 곧 토르의 노여움을 받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자신들이 섬기는 종교가 무력함을 알고, 추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성 보나파키우스는 그 자리에 방금 전에 벤 그 참나무로 성 베드로 예배당를 세웠다. 이후, 그는 열심히 사역을 하며 게르만인들에게 선악을 구별하는 일, 가난한 이에게 돈을 기부하는 일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성 보나파키우스가 참나무를 베어버린 것을 '환경 파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된다. 환경 파괴에 대한 개념은 20세기 이후에나 등장한 개념이고, 성 보나파키우스가 활동한 시기는 서기 8세기였다. 그들에게 '자연'은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성 보나파키우스가 참나무를 베어버린 행위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더 이상 자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번개가 치는 것은 번개의 신 토르가 분노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피조물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이다!
물론 그들이 아직까지 번개가 치는 원인이나, 참나무의 생육 방식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주었다.
거듭 말하지만, 이 관점을 21세기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된다. 환경 파괴가 만연한 요즘, 이 관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현재의 환경 문제들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에는 무신론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자연물을 피조물로 바라보게 만들어준 관점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이것은 감사할 일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번개가 치면 신이 노했다, 라며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를 통해서 번개가 치는 것은 자연 현상이다, 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란 피조물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물론 요즘엔 이 자유를 너무나도 남용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다른 주제이니 이 글에서는 잠시 논외로 젖혀두도록 하자.
결론 +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감사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 이유를 합리성과 이성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선 우주를 창조하실 때 카오스적인 우주를 창조할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창조된 우주는 정교하게 맞춰진 물리 법칙들과 수학 공식들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신실하시고, 합리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2.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셨다.
현재 우주는 질서와 무질서, 양 극단 가운데 정교하게 중간의 바른 길을 나아가고 있다.
3. 그리스도교는 피조물과 창조주를 분리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자연현상들에 의해 두려워 떨지 않는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해당 지점들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와도 어느정도는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는 한발짝 더 나아간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육의 몸을 입고 이스라엘의 작은 땅에 오셨다는 이야기는 사실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믿는다. 그들이 믿는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 모든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감사할 일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첫번째 문장,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을 수 있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감사할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입고, 그 모든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