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토록 큰 고통을 허용하실 수 있는가?

이렁비니 2024. 10. 19. 01:16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토록 큰 고통을 허용하실 수 있는가?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이라는 책에 나오는 질문들 중, 11번째 질문의 내용이다. 어떻게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토록 큰 고통을 허용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고통'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기독교는 굉장히 특이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한마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의 신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하는가?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이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하는 점은, '과연 신이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있는가?'라는 점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신이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신은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없다. 만약 똑같은 질문을 다른 종교에 던져 본다고 얘기해보자.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동남아 쓰나미가 일어난 후, 비슷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했던 정교회 신학자,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그의 저서, '바다의 문들'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자연은 희생의 순환이고, 종교는 인간을 그러한 현실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 존재로서, 이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 우주는 끊임없는 희생의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이 이러한 희생의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깨달음은 신을 희생 그 자체로, 삶과 죽음이 겹쳐 있는 존재로, 평화를 이루면서도 폭력적인, 만물을 창조하는 근원이면서도 만물을 파괴하는 종말을 이끄는 존재로 그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합리적인 생각이고, 이상학적 세련미를 갖춘 형태가 되었을 때 대체로 이러한 결론이 이른다고 한다. 즉,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허용하는 이유는, 이 세계 자체가 창조와 파괴, 희생의 순환 자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그저 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그 예시로 '힌두교'를 든다.

 

힌두교가 얼마나 탁월한 '종교'인지를 보여주는 경전은 [바가바드 기타]일 것이다. 여기서 그리는 영광스러운 신은 지금까지 어떤 '종교'가 그린 절대자로서의 신보다도 완벽하고 경건하다. 힌두교의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주인공 카르나(Kharna)는 두 왕족 세력인 판다바와 카우라바의 전쟁으로 자기편만 600만명의 시신들로 뒤덮인 쿠루 평원을 보며 이를 희생물로 가득 찬 거대한 식탁이라고 말한다. 
그의 관찰은 쓰라림으로 가득하지만 불경하지는 않다. 전쟁에서, 그리고 수백만의 죽음에서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름답고 다양하기 그지없는 자연 세계를 보며 신 존재를 감지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종교적 지혜다. 
[바다의 문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80p]

 

만약 같은 질문, '왜 신은 그토록 큰 고통을 허용하는가?'를 힌두교의 신들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모든 고통도 희생의 순환이라는 자연 안의 일부다,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대답을 납득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왜 사람들은 '신이 왜 고통을 허용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항상 기독교의 하나님을 특정지어서 걸고 넘어지는가이다.

왜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통을 허용한다는 위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하는가? 왜 힌두교의 시바 신이 우주를 파괴한다고 이야기하면, '우린 시바 신 같은 파괴적인 신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왜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는 이런 질문을 하는가?

 

사랑이신 하나님

이 지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증거이기도 한 것 같다. 힌두교는 자연을 창조와 파괴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힘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자연은 너무나도 장엄하게 우리를 허비해버린다. 그렇기에 삶이란 근본적으로 끝없는 고통이며 비참하다고 생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이를 기뻐한다.

 

우리는 악이란 선과 대립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원래 기독교에서 '악'이란 '선'의 부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가장 공경해야할 신념, 없어서는 안될 신념이다.

즉, 악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본질이나 본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순전히 하느님께서 창조한 현실에 기생하는 부패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5절]

그리고 그분은 만물의 근원이요 존재의 원천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선에 참여하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선하다.
(바다의 문들, 105p)

 

사랑은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펼치기 위해, 그리고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 어떤 반대급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안에 충만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 그 분의 풍요로운 사랑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념(pathos)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우리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죄와 고난이 그분을 쇠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의 희생이 그분에게 어떠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가 필요하지 않으며, 그분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그 어떠한 의무를 가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부적 요소가 필요하지 않은,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지만, 여기서 기독교의 역설이 시작된다. 사실,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관심을 가져야하는 그 어떠한 의무가 없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는 피조물인 인간의 부질없음, 하찮음을 이야기하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이사야서 41장 14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버러지같은 너 야곱'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여기서 '버러지 같은 너'라는 히브리어 '톨라'의 뜻은 벌레라는 뜻이다. 벌레, 특히나 부패물에서 나온 벌레...악하고 멸시당하는 자. 야곱조차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런 벌레와 같은 자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기독교의 역설이 보여진다. 하나님은 아무런 의미없이 벌레와도 같은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의무로서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이 없는 우리에게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벌레와도 같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 것이다. 이 지점이 기독교가 고통을 대하는 굉장히 특별한 지점이다.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하나님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욥기에서 욥은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그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욥은 어떠한 '카르마', 혹은 '인과응보'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욥이 전생에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서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하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가 받는 고통에 대한 이유를 낱낱이 다 설명해준다면, 고통받는 당사자에겐 평안이 찾아올까? 혹은 그의 상처입은 영혼이 치유가 될까?

 

만약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자식을 잃게 만든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녀가 이것을 납득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의 자식이 목숨을 잃은 이유가 10년 후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100명의 목숨을 살리는 계획의 일부라고 말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는 예레미야애가를 예시로 든다. 

욥기에서 욥의 고통을 하나님은 설명해주시지 않는다. 하지만 예래미야애가에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당했던 고통은 명확하게 그 이유가 있는 고통이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따라서 그 성은 불타고, 백성들은 포로가 된 것이다. 이것은 명확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 잘못에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고통은 욥과 다르게 그 이유를 아는 고통이다.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예레미야애가 5장 6-7절)

 

예레미야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가 당한 고통의 원인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이유를 안다는 것이 그의 슬픔을 덜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자에게 무엇이 위로가 될 수 있는가?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십자가

기독교인들의 경우,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 주님의 연단하심의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마치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와 비슷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가지 교훈을 깨닫는다.

그것은 '사람은 살아갈 의미가 있을 때, 비로소 살아가게 된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 이론에 바탕으로 '의미치료'를 개발한다. 삶의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원인을 찾기 보다는, 고난 가운데서도 살아가야할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 대해선 추후에 더 자세히 다뤄보겠다.

 

하지만, 때로 어떠한 고난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고난은 너무나 크게 다가와서 의미를 찾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인간은 스스로 너무나도 큰 멍에를 지게 된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대한 찬양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인 것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심리치료 방안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 = 주님이 내게 주신 연단'으로 인식한다면 너무나도 편협한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보다도 훨씬 더 크다.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사랑이다. 십자가를 마주한다는 것은,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 말씀은 그래서 큰 은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고난받는 자들,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만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그 모든 고통 가운데 흘렸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대해서 '바다와 문들'이란 책에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물을 향한 사랑으로 정화된 영혼은, 하느님의 의지와 주권에 대한 오해와 하느님의 통치와 섭리에 대한 오류를 걷어내고,
급진적 자유와 해방의 희망, 위대한 승리와 성취의 약속을 향해 자기를 개방한다.
[바다와 문들]

 

다음과 같은 말을, 일본의 천주교 작가, 엔도 슈사쿠는 아름다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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