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대두되는 시대상황 속, 사람들은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자기계발부터 인문학 서적, 고전까지 다양한 책들을 읽기도 한다. 서점에 가보면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들이 잘 정리된 책들이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이 말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철학'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러이러 하게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라고 말했다, 등의 대답을 토대로 각자만의 인생에 대한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철학'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종교'가 해주던 답을 '철학'이 해주고 있는 현대 사회, 그리고 고대 로마 사회
과거에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종교'가 해주었다. 예를 들어 '너는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계명은 그 자체로 삶의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 많은 이들이 무교가 되고, 종교는 현시대에 한발 뒤쳐진 느낌을 주고 있다. 과학 기술이 발전된 현재, '기적'이나 보이지 않는 '신'이란 존재를 이야기하는 종교는 이성의 시대 이전에나 믿던 사상인 것 처럼 보인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만 벌어졌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받아들여지기 이전, 그리스와 로마의 다양한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 사상을 하나의 '상품화'시켰다. 이런 세태에 대해 동시대의 로마 풍자작가, 루키아노스(125 - 180)는 그의 저서, [도道를 팝니다]에서 그당시 로마의 대도시들을 장식하던 철학 행상업을 풍자했다. 아래 대화는 지중해 동부 어느 그리스어권 도시의 노예 시장을 배경으로 한다.
제우스: 어서 의자를 정리하고 저기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 를 마련하게. 도를 가져와 가지런히 세워놓도록 하게,
보기 좋게 단장하는 것도 잊지 말고. 헤르메스 그대는 어서 사람들을 모으게.
헤르메스: 신들의 가호로, 이제 구매자들이 경매장에 등장합니다. 모든 도, 철학, 가르침을 내놓겠습니다. 지금 현금을 낼 수 가 없다고요? 일단 보증금만 내고 내년에 마저 내시지요. (제우스를 향해) 어떤 도를 먼저 내놓아볼까요?
제우스: 저기 긴 머리를 한 이오니아 사람을 데려와 보게. 근엄해 보이는 것이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헤르메스: 거기, 퓌타고라스 철학자여, 이리로 나와 앞에 한 번 서보게. 우리가 살펴볼 수 있게.
제우스: 시작하지.
헤르메스: 자, 도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근엄한 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분 있으신가요?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으 신 분, 만물이 만들어내는 화성의 영감이 궁금하신 분, 부활을 꿈꾸시는 분?
[루키아노스, 도道를 팝니다]
이어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데모크리스토스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학파 철학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의 학파가 가르치는 바들을 읊는다. 소크라테스도 나와서 자신의 '도'를 설파하기도 한다. 루키아노스는 그의 저서에서 철학자의 호소력은 그가 속한 학파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보다 어떤 옷차림인지, 어떤 성공을 보장하며, 영향력 있는 집단들에서 얼마나 인기 있고 높은 평가를 받는지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풍자한다. 루키아노스의 또다른 저서, [헤르모티모스]는 사람들이 여러 학파 가운데 어느 한 학파를 선택하는 논리에 대해 조롱한다.
이것부터 가르쳐주게. 어떻게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선의, 참된 철학을 처음부터 구분할 수 있을지.
헤르모티모스가 대답한다.
"이야기하리다. 보아하니 스토아 철학이 제일 인기가 많았네.
그래서 그게 최고인가 싶었네."
[루키아노스, 헤르모티모스]
헤르모티모스는 스토아 학파들이 품위 있게 걸으며,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현명하며 머리도 짧고, 유약함이나 견유학파 같은 극단적인 무관심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를 선택했다고 한다.
기원후 2세기 무렵의 철학 학파는 어떤 사상을 넘어서 삶의 '길'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철학은 심오한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다루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방식, 윤리를 제안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는 그의 저서, [명상록]에서 철학이란 많은 이들이 좇는 허무한 목표에 대비되는 도덕적 이상이라고 썼다.
"철학의 과제란 토론을 통해 적합한 것을 찾아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
[1세기 경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무소니우스 루푸스]
"철학이란 악이란 무엇이고, 악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인지 보여주며, 정신에서 허위를 제거하고,
견실한 위대함을 부여하되 허울뿐인 위대함은 가라앉힌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
이처럼 철학은 대중의 영역에 스며들었다. 철학 학파는 '현상에 관한 이해 가능한 설명'뿐 아니라, '계획이 있는 삶'을 제시했다.
두려움과 용기, 마음의 평화, 근심, 사랑, 자유, 노년, 죽음, 부와 명성 등등이 철학의 주제였다. 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굳건하고 확실한 길을 제시했으며, 철학에 입문하여 삶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바뀐 사람을 두고 '개종'하였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반해서 로마인들에게 이방 종교는 '미신'이었다.
철학에 뒤떨어지는 '미신'
서기 2세기경, 기독교를 비판한 로마의 철학자, '켈수스'(Celsus, 67 - 130)는 로마인들의 정서에 반하는, 좋지 못한 소문들이 들리는 밀교에 기독교를 빗대어 표현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전반부에 기독교를 퀘벨레교 탁발 사제, 미트라교, 다이몬이나 헤카테의 환영을 숭배하는 무리들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이집트인들의 미신적 관행과 유사하며, '환영을 소환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박코스 밀교 신자들'이라고 말했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미신'은 낯설고 이상한 신앙과 관행을 뜻했다. 그들에게 미신이란 로마 제국의 밖에서 들어온 다양한 이방 종교들, 브리타니아의 신앙, 북유럽 게르만인들의 관행과 이집트들의 전통적 관습들, 유대인들의 '유대교' 등등은 모두 '미신'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방 종교들을 '미신'이라고 터부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그들이 믿는 신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고,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을 믿는 자들은 광신적이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책임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닌, 통제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신에게 맡기는 자들이었다.
물론 로마인들도 신들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삶 깊숙히 로마의 다신교는 뿌리박혀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경건했고, 그러한 경건함을 통해 그들 스스로를 로마 제국 밖, 이방인들과 구별짓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것들을 이방의 것들과 비교하자면 여타의 것들에 있어서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열등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나,
경건, 다시 말해 신들을 숭배하는 일에 있어서는 훨씬 우월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그렇다면 현대 21세기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이미지는, 그리고 '철학'이 가진 이미지는 어떨까?
현대 사회에서 철학과 종교 -- 헤겔 --
내 경험을 비추어 보았을 때, 주변인들에게 기독교의 얘기를 꺼내면, 그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곤 했다.
하지만,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자기계발서나 철학 서적에서 이야기한다면, 인생의 중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귀담아 듣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에서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와 관계있는 이야기가 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인생의 방향성을 가르쳐주는 지혜로운 말이다. 하지만 구약의 욥기에서 욥이 말하는 말,
"내가 왜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그 배 속에서 나오면서 왜 숨을 거두지 않았던가?" (욥기 3장 11절)은 그냥 단순한 신화속 일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쇼펜하우어의 반출생주의 인생론에는 '내 이야기다'라고 공감하면서, 욥기에서 욥이 겪는 고통은 그냥 나와 전혀 다른 이야기, 신화 속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것일까?
아마 사람들의 인식에서 '철학'이 '종교'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에 철학과 종교는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사실상 이 둘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했다. 현재, 철학이 종교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고 믿게 된 계기에는 '헤겔'의 역할이 크다.
헤겔은 역사를 각 단계를 통해 보았고,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역사가 진보한다고 보았다. 그는 각 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 '절대 정신'이 스스로를 조금씩 드러낸다고 보았다. 따라서 역사가 흐를수록, 절대 정신을 통해 진리가 더 밝혀지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헤겔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지혜'를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점차 드러난다. 따라서 그 올빼미는 새벽녘이 아닌, 해질녘, 즉,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다는 의미이다. 더 자세한 헤겔의 철학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포스팅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https://iranbinny.tistory.com/10
어쨌든 중요한 것은 헤겔은 각 시대마다 서로 다른 매개체를 통해 '절대 정신(이념)'이 인식되어져왔다고 생각했다.
이집트 왕조와 같은 고전 시대, '이념(절대 정신)'은 '건축물'과 같은 '예술'을 통해 인식되어졌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자, 형식과 이념간의 격차가 벌어지며, 예술이라는 그릇을 통하여 이념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는 예술이 아닌, '종교'를 통해 진리와 이념을 담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헤겔이 살던 19세기 근대에는 '종교'가 하던 그 역할을 '철학'이 넘겨받게 된다.
예술(고대 시대) --> 종교(중세 시대) --> 철학(근대 시대)
종교는 예술보다 더 형이상학적이다. 예술은 손에 잡히는 것,(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이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 등)이었지만, 종교는 그보다 불명확하다. 헤겔은 중세 시대를 회화(종교화 등)가 발달한 시대로 바라보았다.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들보다, 중세 시대의 회화는 덜 명확하다. 그리스의 조각품들은 만질 수 있는 3D 오브젝트들이지만, 회화는 2D 평면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중세 시대는 음악과 시가 발달했다. 따라서 시대가 지날수록 '절대 정신'이라는 이념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시대가 진보할수록 점점 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발전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철학은 형이상학이다.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절대정신(이념)'을 이야기할 때, 종교 보다는, 철학이 더 적합한 그릇이라고 헤겔은 설명한다. 헤겔의 이러한 철학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20세기의 세계사는 '이념대립'이라는 아젠다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념'이 확장되어오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이 점점 더 눈에 잡히지 않는, 불명확한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이 말하는 '절대 정신'은 어떠한 큰,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의 가장 큰 차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인격 신이다.) 따라서 철학이 종교보다 우위에 있다. 왜냐하면 시대를 거쳐오며 외적 질료로서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순수 이념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헤겔 이후, '철학'이 대두된다. 그리고 '철학'은 '종교'의 자리를 차지한다.
내 생각에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신을 죽인 자는 '헤겔'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현재는 고대 로마처럼 철학이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비이성적인, 따라서 나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요즘들어 불교가 다시금 유행하는 이유도 불교가 종교라는 틀이 아닌, 삶의 철학, 이라는 틀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어서인 것 같다.
철학으로서 받아들이는것은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의 성경 또한 삶의 길잡이가 되는 자기계발서나 철학서로 포장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전도하는것은 좋지 않을까? 실제로 성경에는 삶의 지침이 될만한 좋은 말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된다면 성경을, 그리고 기독교를 제대로 전할 수 없다. 단언컨대,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읽기 힘들고 불편한 책이다. 단순히 글이 알쏭달쏭해서 어렵다는것이 아니라, 성경을 마주하는것은 거울을 보는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너무 쉬워서 한문장으로 요약될 정도이다.
[마22:36-40, 우리말성경]
36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37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
39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철학 못지않은 간단하고 명료한 삶의 방향성이다. 하지만 이것을 삶으로 실천하기란, 기독교적 용어로 말하면, 십자가의 길, 제자도의 길을 따라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 길 앞에서 그 길을 걸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연약한 나의 모습을 마주하기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있는 티끌은 따질수 있어도, 나에게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나의 들보를 볼 수 있는 방법은 거울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거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읽기 두려운 책이다.
어째서 너는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3, 우리말성경]
그러니 성경을 마주하는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이와 반대로, 철학은 쉽다. 염세주의적 사고를 하던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면 안정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나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믿는 사람이 니체의 초인(위버맨쉬) 개념을 접하면 이것은 그에게 위안이다. 그가 가고있는 이 고독한 길이 옳은 길이란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던 것들이랑 똑같은 생각들을 타인, 그것도 유명한 철학자의 입으로 듣는다면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니라, 즐겁고 편안한, 안정감을 느끼는 일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식과 교양을 쌓는다는 느낌도 준다. 남들이 넷플릭스나 유튜브 쇼츠를 볼때, 쇼펜하우어나 니체, 사르트르 등의 서적을 읽는다면 유익한 시간을 보냈기에 뿌듯하다.
반면에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것은 나의 길을 부정하는것이다. 이것은 어디 자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성경을 읽는다고 교양이 쌓인다? 그런말은 그 어느 목사님한테서도 들어본적이 없다. 이것은 두렵고 불편한 일이다. 두려운걸 넘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죽음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길을 복되다 한다. 왜냐하면 그 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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