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생애 당시 유대 지방 총독이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처형했다는 이유로 이천년동안이나 수십억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빌라도의 입장에선 억울할 것 같다. 그가 예수를 처형한것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대역죄인중의 대역죄인이지만, 빌라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성가신 행정업무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이천년동안이나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를 사도신경을 통해 욕하고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기도
덴마크의 신학자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이교도는 진리에 결코 빌라도 이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그 후에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1837년 10월 16일 작성된 키르케고르의 일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경에는 빌라도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적인 설명은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통치 시절, 유대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에 관한 기록은 로마인들의 기록에도 많이 찾아볼수 없기에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기원후 26년에 아내 프로쿨라와 함께 현재 유대 땅에 취임하여 10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빌라도는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예수가 처형되고 약 백년 후, 빌라도와 굉장히 유사한 케이스의 플라니우스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 등장한다. 그는 소아시아(현 터키) 북부 지방의 폰토스, 비타니아 속주를 통치한 총독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기독교인들을 처형시켰다.
플라니우스의 케이스를 유심히 추적해가면 빌라도의 사고방식과 왜 예수를 처형시켰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비타니아-폰토스 지방의 총독, 플라니우스
플라니우스(61 - 113)은 전형적인 로마 상류 특권층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자연사]라는 백과사전을 쓴 것으로 유명한 (대)플라니우스였고,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 때문에 죽은 외삼촌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에겐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한 돈과 좋은 가문이란 두가지 전제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책임을 의식하던 엘리트 집안이었고, 황제로부터 원로원 의석을 하사받은 자들이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이 가진 재산을 위협할 수 없었고, 그들은 엘리트로서의 책무를 매우 중히 여겼다.
그는 로마의 관료 체제를 따라서 성실하게 승진한 인물이었다. 호민관 임기를 거쳐, 법무관, 집정관을 차례로 지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승진하며 마침내 서기 109년(혹은 110년)에 소아시아의 황제 속주 비튀니아 . 폰토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속주의 총독이 되는 것은 그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총독이 된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로마의 권력과 권위를 대변하며 판결권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단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굉장한 권력의 자리였다. 그는 현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정계를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다짐은 그가 적은 서한에 나와있다.
권력자가 사람들의 경멸을 통해 자신의 힘을 경험하는 것은 악한 일이네. 공포로 존경을 사는 건 추한 일이지.
바라는 것을 얻는 데는 두려움보다 사랑이 훨씬 더 유용하다네. 자네가 떠나면 자네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지만,
자네에 대한 사랑은 남기 때문이네. 두려움은 증오로 이어지지만, 사랑은 존경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일세.”
[플라니우스의 서한 8.24]
그가 총독으로 임명된 비티니아-폰토스 지방은 로마 세계에서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 서편의 비티니아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편의 폰토스는 산이 많고 양모를 수출 산지였다. 또한 산지의 넓은 숲에서 나오는 목재는 선박을 건조하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좋았다.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에 따르면 이곳에서 나오는 단풍나무와 견과류 나무들은 탁자를 만드는데 유용했다고 한다.
폰타니우스가 이 지역에 당도한 2세기 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 - 1794)) 실제로 국내의 갈등과 분열, 내전과 도미티아누스의 무단 통치가 안겨준 분노의 시대가 지나가고 평화와 번영, 안정의 시대가 도래했다. 80년이 넘게 지속된 행복한 로마의 최전성기 시기 동안에는 미덕과 능력을 두루 갖춘 네르바, 트리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에 의한 선정이 베풀어졌다.
이런 행복한 시기 가운데 폰타니우스는 외삼촌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고,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39세의 나이에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고, 국고를 다루는 중요한 직책을 연달아 맡기도 했다. 그는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로마 관료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플라니우스는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해결해나갔다.
기독교인들과 관련된 민원을 처리하다
플라니우스는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며 해당 도시의 시민들이 요구한 민원들을 처리했다. 그가 당면한 민원 과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도시 재정 처리 과정에서 문제점 파악, 각 도시의 자치 행정 감찰, 정치적 움직임, 혹은 잠정적으로 정치적이 될 수 있는 움직임 봉쇄,
지연된 형사 업무 처리, 속주의 군사적 상황 시찰 등이다.
총독에 임명된지 약 3년 후, 서기 112년, 그는 폰토스 북부의 어느 해안 도시에 있었다. 그가 트리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확한 도시명이 안 적혀있었으므로 플라니우스가 해당 민원을 어느 도시에서 받았는지는 모른다. 편지의 맥락상, 아미소스 시와 서쪽으로 160km 떨어진 아마스트리스 도시, 둘중 하나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추측된다.
몇몇 지역 주민들은 플라니우스를 찾아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어떤 불평인지는 모르나, 편지의 행간으로 추측해보면, 도축업자와 연관되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장사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어쨌거나 도시의 그리스도인들과 나머지 거주민들 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을 심리해본 적이 없습니다.따라서 무엇을 어디까지 심문하고 처벌하는 것이 관례인지 모르겠습니다.
적잖이 망설였습니다.
[플라니우스의 서한, 10.96]
로마의 관리들은 항상 외부 종교 집단들에 대처해야 했다. 플라니우스에게 '기독교'란 낯선 이방의 종교였다. 그래서인가, 플라니우스는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였다고 트리야누스 황제에게 말한다. 하지만 플라니우스는 들어온 민원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들을 집합시켰다. 그들중 몇몇은 로마 시민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집단의 하층민들이었다. 해방 노예, 육체 노동자들, 장인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플라니우스는 먼저 그들이 하는 예식이 어떤 것인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하지만 심문 결과, 그들은 딱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단지 특정한 날 해뜨기 전에 서로 번갈아 가며 모임을 가진 게 전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신처럼 찬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맹세함으로써 자신들의 그룹을 결집시켰습니다.
이는 어떤 범죄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절도나 강도 그리고 간통을 하지 말 것을 그리고 약속을 지키고 맡겨진 재화가
요구될 때 거절하지 말고 내어줄 것을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 후 그들은 일단 헤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평범한 식사를 함께 나누기 위해 재차 모이는 것이 그들의 관례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만 두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폐하의 명령을 따라 그와 같이 폐쇄적인 모임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플라니우스의 서한]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원로원이 이탈리아에 퍼지고 있던 바쿠스 숭배를 탄압한 사건을 다룬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 에트루리아로 전파된 바쿠스 숭배자들의 야간 집회는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로마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들의 비밀 집회를 포도주의 향연이 주는 쾌락과 광란의 춤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달랐다. 그들은 영아 살해나 집단 난교를 치르는 비밀 의식을 치르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절도나 강도, 그리고 간통을 하지 말자. 가난한 자들을 돕고 서로 사랑하자'라고 서약하는 모임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마저도 총독이 하지 말라고 하자,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플라니우스는 참으로 그들에게서 딱히 '죄'가 될만한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범죄 사실이 없어도 처벌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그 이름과 관련된 범법 행위만 처벌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플라니우스의 서한]
플라니우스의 이러한 고민은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했을 때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빌라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누가복음 23장 4절)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들에 적힌 빌라도의 이러한 고민은 플라니우스의 고민과 유사성을 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고자 노력한다. 그는 3번이나 '이 자(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 나는 그를 풀어주고자 한다'
라고 군중들에게 말한다. 예수는 침묵하나, 군중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다.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누가복음 23장 14절]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누가복음 23장 20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누가복음 23장 22절]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플라니우스도 기독교인들에게 3번의 기회를 준다.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된 자들에게 '네가 기독교인이냐'라고 두세번 거듭하여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편, 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된 자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랐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면 두세 번 거듭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게다가 사형 선고의 위협까지 덧붙였습니다.
[플라니우스의 서신]
플라니우스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티니아-폰토스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기전, 분명히 "공포로 존경을 사는 건 추한 일이지.
바라는 것을 얻는 데는 두려움보다 사랑이 훨씬 더 유용하다네."라고 말하며 공포를 앞세워 통치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는 두려움은 증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빌라도는 이러한 지혜가 플라니우스보다 부족했나보다. [유다 고대사]를 쓴 동시대의 유대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 감정을 무시하고 로마 황제의 모습을 그린 깃발을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유대인들의 격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독교'와 관련된 일만큼은 플라니우스의 대처가 현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가 황제에게 보낸 다른 서신에서는 황제의 답신을 기다린 후,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선 조치, 후 보고를 한다. 이는 신중했던 그의 평소 성격에 비춰보면 특이한 케이스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특정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사형시켰다. 그들 중 몇몇은 로마 시민들이었는데, 플라니우스는 그들을 로마로 보내버렸다. 그들의 운명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을 사형시킨 이유에 대해 플라니우스는 서신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자는 사형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완고함과 강퍅한 고집만으로도
처벌받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플라니우스의 서신]
플라니우스는 그들이 무죄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가 무죄임을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플라니우스는 그들이 단순히 완고하고 고집스럽단 이유만으로 그들을 사형시킨다. 역사학자 레너드 L.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이후로 쫓기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 정부로부터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고발되고 유죄가 확정되면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역사학자, 레너드 L. 톰슨]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당하는 것은 현대 우리 사회의 눈으로 보았을 때엔 굉장히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플라니우스는 무고한 시민들을 탄압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였던 것일까? 트리아누스 황제는 플라니우스의 위와 같은 조치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을까?
아래는 트리아누스 황제의 서신이다.
로마 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리아누스 황제의 답신]
트리아누스 황제 또한 플라니우스의 조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황제가 권면한 방법대로 플라니우스는 실행에 옮겼다.
그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잠시 발뺌하다가 다시 또 그리스도교 집단을 조직한다면 이것은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한 이들을 모아두고, 하나의 '시험'을 마련했다.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등의 신상과 트리아누스 황제의 조각을 가지고 오도록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한 자들은 사형에 처하고, 혐의를 부인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조건을 부과했다. 그들은 플라니우스와 함께 신들을 부르며 트리야누스의 조각상 앞에 ‘유향과 포도주’를 바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라고 요구한다.
왜 플라니우스는 무죄임을 알면서도 기독교인들을 탄압했는가
플라니우스가 기독교인들에게 행한 '시험'은 17세기 에도 막부 시기, 일본의 다이묘들이 숨어있는 그리스도인(카쿠레 기리시탄)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썼던 방안과 굉장히 유사하다. 그들은 예수, 또는 성모 마리아 모습이 새겨진 목판을 바닥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조용히 예를 올리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잡아갔다. 무고한 그들은 고문당하고 순교했다.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한 다이묘들은 악인인가? 적어도 카쿠레키리시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니우스의 경우는 어떨까?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한 탄압 또한 일본의 다이묘들이 한 탄압 못지 않게 잔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니우스는 악인인가? 그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평가는 그의 묘비에서 드러난다.
가이우스 플라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 오우펜티나 분구 출신으로 루키우스의 아들이다. 집정관, 조점관을 역임하다.
… 총독의 권한을 부여받아 폰토스 . 바튀니아 속주로 파견되다.
로마 테베레 강 제방 및 하수도 관리관, 사투르누스 국고 관리관, 군사 재무 관리관, 법무관, 호민관, 황제 지명 재무관, 예비기사대장, 제3군단 군사대장, 십인관을 역임하다.
욕장 및 비품 비치를 위한 추가 300,000세스테르티우스, 유지비 200,000세스테르티우스, 해방 노예 후원 및 시민들을 위한 연간 만찬비 명목으로 1,866,666세스테르티우스를 로마시에 유증하다. 생전에 평민 계급 출신 남녀 청소년들을 위해 500,000세스테르티우스, 도서관을 위해 100,000세스테르티우스를 후원하다.
[플라니우스의 묘비]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서기 113년, 그는 총독으로 있던 중, 회의를 진행하면서 업무에 몰두하다가 과로사로 쓰러져 사망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 애쓰며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신들에게 경건했던, 옛 로마의 가치를 충실히 따른 인물이었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로마 시와, 평민 계급 출신의 청소년들, 도서관에 기증했다. 그는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를 탄압한 인물이었다. 도대체 왜일까? 왜 플라니우스와 같은 신실하고, 경건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이 기독교인에 관해서만큼은 그들을 탄압했던 것일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가운데 속하지 않다는 말은, 세상에 속한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오류'인 것이다. 오류는 마땅히 제거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와 같은 왕조 국가에서, 세자의 형제들은 잠재적 위험 요소였다. 그들은 언제든지 왕위를 찬탈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형제 중 한명이 왕 위에 오르면, 나머지 형제들은 숙청되곤 했다. 세자의 형제들을 숙청하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있으면 나라가 내전이 일어나고,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냉정하게 보자면 그들을 숙청하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었다. 플라니우스는 합리적 판단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사형시킨 것이다. 그들은 '로마 제국'이라는 세상 내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세상 '밖'에 존재하는 오류였다. 플라니우스는 그들을 증오하거나 원한이 있어서 사형시킨 것이 아니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었던 것처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한복음 15장 18절]
아마 플라니우스에게 죽임당한 이름 모를 그리스도인들은 위 구절을 떠올렸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보자 먼저, 약 100년 전 쯤에 빌라도에게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플라니우스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 없이 죽어갔다. 플라니우스는 몰랐지만, 그들은 알았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일서 3장 13 - 14절]
플라니우스는 사랑을 몰랐을까? 그도 스스로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 보낸 서신은 '사랑'으로 통치하기로 결심하는 내용이 나온다. "자네가 떠나면 자네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지만, 자네에 대한 사랑은 남기 때문이네. 두려움은 증오로 이어지지만, 사랑은 존경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일세."[플라니우스의 서신 중.]
플라니우스는 분명 두려움보다 사랑이 강력하다는 것은 알았다. 두려움은 잠시지만, 사랑은 오래 남는다는 진리. 그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몰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플라니우스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플라니우스의 사랑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이다. 속주의 총독에서 속주의 시민들에게로 내려오는 사랑. 어떻게 보면 동양의 유교 봉건적 질서와도 유사하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반대이다. 그것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아래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니우스는 사랑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을 최고의 가치에 두지는 않는다. 그는 '존경'을 얻기 위해 '사랑'으로 통치할 것이라 다짐한다. 로마인들은 '명예'를 중요시 여겼다. 명예는 대중의 존경에서부터 나온다. 따라서 그는 사랑의 강력함을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이야기한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계명'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일서 3장 23절]
플라니우스의 사랑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 |
사랑의 방향성 |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 |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사랑 |
사랑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가? | 아니다. 존경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을 사용한다. |
그렇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다. |
다시 키르케고르의 기도로 돌아와보자.
이교도는 진리에 결코 빌라도 이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그 후에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1837년 10월 16일 작성된 키르케고르의 일기]
빌라도는 '이 자는 죄가 없다'라고 세 번이나 말했으나, 결국 그를 십자가에 매달고 만다.
플라니우스도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기독교인들을 처형시켰다. 왜일까? 세상 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크나큰 오류이다.
따라서 세상은 그를 먼저 미워했고, 그를 따르는 자들(그리스도인) 또한 미워하는 것이다. 이 '미움'은 감정적인 미움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세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냉혹한 과정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본다면 이것은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는 너무나도 큰 확신을 주는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보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장 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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