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제대로 QT를 하면서, '느헤미야'를 읽었다.
느헤미야가 굉장히 리더쉽이 강한 지도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느헤미야의 성벽 건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을 지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벽 재건을 지시한다. 성벽의 각 구역들을 각자가 맡고 수많은 이들이 함께 성벽을 세웠다. 다같이 힘을 합쳐 하나님의 성벽을 건설한다. 수많은 이들이 성벽을 쌓기 위해 자신의 노력을 행했으나, 주변인들은 그들을 조롱했다.
‘신발랏은 우리가 성벽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그는 유다 사람들을 조롱하며
그의 동료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저 유다 사람 약골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 성벽을 복원하겠다는 것이냐?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냐? 하루 만에 공사를 끝내겠다는 것이냐? 타 버린 돌들을 저 흙무더기 속에서 원상 복구하겠단 말이냐?”
[느헤미야 4장 1-2절]
이러한 그들의 조롱과 멸시 앞에서, 그들은 꿋꿋히 일했다. 그들은 외부의 여러 공격들에 대해서, 방어하기 위해 밤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지내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일을 했다.
이렇게 해 우리는 새벽 동틀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일을 계속했고 백성들의 절반은 창을 들고 일을 했습니다.
그때 나는 또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과 그 부하들은 밤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지내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일을 하시오.”
나도, 내 형제도, 내 부하도, 나와 함께 경비하는 사람도 옷을 벗지 않았고 각자 무기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물 마시러 갈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4장 21-23절]
느헤미야는 먼저 솔선수범하는 리더쉽을 보여주었다. 외부의 조롱에 흔들리지 않았고, 자기가 먼저 나서서 옷을 벗지 않고, 물을 마시러 갈 때에도 무기를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그들의 성벽에 대한 공격은 성벽이 지어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공격은 느헤미야의 시대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공격
예수 그리스도 이후, 사도 바울을 통해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퍼지게 되었다. 그당시 기독교는 ‘사람 고기를 먹는다’, ‘불법적인 성관계를 한다’ 등의 엄청난 오해를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조롱하였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했던 서기 2세기 경의 철학자 켈수스(Celsus)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태어난 새로운 인종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고향도 없고 전통도 없다.
그들은 일치 단결하여 종교적이고 시민적인 제도에 맞서고 있으며, 불법적이고 파렴치한 행위로 말미암아
악명이 높지만, 그들은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기뻐한다.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 AD. 170년, 철학자 켈수스 -
기독교의 역사는 항상 고난과 핍박과 함께 했다. 4복음서 이후의 신약성경의 수많은 서신서들이 쓰여진 시기는 박해가 일어난 시기랑 겹친다. 사도행전에는 스데반의 순교, 야고보의 순교와 더불어 핍박당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등장한다.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인들을 화형시켰을 때에도, 계속해서 신약의 서신서들이 쓰여진 시기였다. 이러한 박해는 현재진행중이었고, 그런 가운데 서신서들이 쓰여졌다. 그들에게 서신서는 그야말로 한줄기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박해는 박해의 시작에 불과했다. 신약성서가 다 쓰여진 이후에도 박해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서기 177년에는 골 지방의 리옹에서 48명의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은 죽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중, 249년에 있던 박해는 아주 심했다. 데시우스 황제 재위 시기, 처음으로 제국 전역으로 박해가 번졌고, 이는 기독교를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시도였다. 데시우스 황제가 251년, 사망하면서 박해는 사그라들었지만, 그 이후에도 박해는 이어졌다.
303년에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시작된 박해는 정말 최악이었다. ‘대박해’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그는 모든 군인들에게 제사에 참여하라고 했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형을 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성장했다. 결국 갈레리우스 황제는 311년에 다시 기독교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로마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중단한다. 이 시기까지 총 10번의 박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가난한 이들을 차별없이 도와주었다. 250년경 한 로마의 주교가 쓴 글을 보면 ‘46명의 사제, 7명의 집사, 7명의 부집사, 42명의 조수, 52명의 악귀 추방인, 독경인, 문지기, 1500명 이상의 과부와 걸인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도왔던 그들.
느헤미야 역시 마찬가지로, 성벽을 짓는 와중에도 틈틈히 이방 민족들에게 팔려간 유다의 형제들을 힘닿는대로 속량해주었다.
그리고 동포들에게 폭리를 취하는 일을 멈추게 하고, 느헤미야 자신도 힘겨운 세금을 물리는 일을 멈추었다.
“나와 내 형제들과 내 부하들도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꿔 줄 테니 이제부터는 폭리를 취하는 일을 제발 그만두시오!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과 집들을 오늘 당장 그들에게 돌려주고 당신들이 그들에게 추징한 폭리, 곧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100분의 1도 돌려주시오!”
[느헤미야 5장 10-11절]
그러나 내 앞에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들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리고 음식과 포도주 뿐 아니라 은 40세겔(456g)을 갈취했습니다. 심지어 총독 밑에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나는 땅 한쪽도 사지 않고 오직 이 성벽을 쌓는 일에만 헌신했고 내 부하들 역시 성벽 쌓는 일에만 마음을 썼습니다.
[느헤미야 5장 15-16절]
그들은 피곤했을 것이다. 그들은 옷을 벗지 않고, 각자 무기를 가지고, 심지어 물을 마시러 갈 때에도 무기를 가지고 갈 정도로, 항상 ‘5분 대기조’의 상태를 유지했다. 사람이 피곤하고, 지치면 모든 것이 귀찮고 주변을 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들은 주변인들을 신경 쓴 것이다. 폭리에 의해 고통받는 이웃들을 챙기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이것을 같은 유대 민족이니까 당연히 민족주의 이념에 의해 도와주었겠지, 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구약을 굉장히 오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같은 유대민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같은 민족을 착취했다. 느헤미야 5장 7절에서 느헤미야는 분노한다.
"당신들은 지금 각기 자기 형제에게 폭리를 취하고 있소!"
나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큰 집회를 열고...
[느헤미야 5장 7절]
구약은 항상 신약과 함께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 구약의 모든 것들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자기 형제란, 신약으로 넘어오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 모든 이방 족속들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문화, 다른 민족이라 할지라도, 차별없이 도와주었다. 단순히, 같은 민족만, 자기 사람들만 챙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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