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믿음

이렁비니 2024. 8. 20. 10:24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한 것이 나온다. 한번 3부작으로 각각 요소들이 어떤 의미인가를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첫번째인 "믿음"이다.

믿음 vs 신뢰

믿음과 신뢰는 조금 다른 것 처럼 느껴진다. 신뢰는 믿음보다 안전하다. 신뢰는 믿음에 비해 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 라는 속담에서 돌다리는 신뢰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신뢰를 얻기위해선 객관적인 사실과 지표가 필요하다. 따라서 신뢰를 얻기 위해선 과거 데이터가 필요하다.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러 기업과 정부에선 각 제품이나 기관의 "신뢰평가"를 하지, "믿음평가"를 하지 않는다.

신용평가사에선, 해당 기업의 원리금 상환능력 등, 여러가지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한다. 그리고 AAA등급부터 C등급까지 단계별로 해당 기업이 발행하는 채권의 신용도를 나눈다. 낮은 신용도일수록 위험한 셈이다.

여러 신용평가사에서 평가한 기업과 국가의 신용도.

이것을 보면 신뢰는 수치화할 수 있는것 같다. 그리고 신용도처럼 신뢰는 등급이 있다. 하지만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0 아니면 100이다. 신뢰는 10, 20, 30...이렇게 부분적으로 신뢰할수 있다. 하지만 믿음은 믿거나 안믿거나. All or nothing이다. 따라서 위험하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르케고르는 믿음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여기엔 절벽에서 절반만 뛰어내린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리고 믿고 뛰어내렸다가 망해버릴수도 있다. 아래, 양산시 일자리센터 '워크넷' 홍보 영상처럼 말이다.

(양산시 일자리센터 '워크넷' 홍보 영상. 팀장님을 믿은 진솔씨는 이내 배신당한다... ㅠㅠ)
 
믿음은 위험하다. Salto mortale. 이탈리아어로 죽음의 도약, 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은 이 절벽앞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하는것과도 같다. 우리는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 여러가지를 체크하고 의심하며 확인할 수 있다. 스카이다이빙 전에 낙하산의 작동여부를 단단히 체크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것은 신뢰도를 체크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 뛰어내리는것은 신뢰가 아닌 믿음이다.
믿음은 불확실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예수께선 보지 않고도 믿는 자를 복되다 하신다.

[요한복음 20:27-29]
2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내 주이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
29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다. 보지 않고, 증거도 없이 믿으라니. 양산시 쇼츠의 진솔씨처럼 팀장님을 믿었다가 배신당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도대체 뭘 믿고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란 말이지?
이것에 대해 답하기 전에 한번 표로 '믿음'과 '신뢰'에 대해 정리하고 넘어가보자.

 신뢰(Faith)믿음(Trust)
전반적인 정의경험과 증거에 기반한 부분적이고 이성적인 확신증거 없이도 전적으로 확신하는 초이성적 또는 비이성적인 확신
기반과거의 경험, 객관적인 증거, 또는 어떤 사람이나 시스템의 일관된 성과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언제나 약속을 잘 지켰다면 그 친구를 신뢰하게 된다.믿음은 때로는 증거가 부족하거나, 명확하지 않거나, 심지어 증거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갖는 확신을 의미한다. 종교적 믿음,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보통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도 유지된다.
부분성부분적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신뢰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운전은 잘하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면 운전 기술에 대해서는 신뢰하지만 시간 관념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믿음은 보통 전체적이며, 일부분만 믿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믿음은 "All or nothing"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신뢰와 달리 믿음은 부분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신뢰는 종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형성됩니다. 객관적인 데이터, 과거의 행동, 타인의 추천 등 신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있다.믿음은 때로는 이성적 판단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거나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유지될 수 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믿음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배신'은 치명적이다. 얼마나 치명적인지, 단테는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 악마 루시퍼의 입에 배신자 3명을 씹어먹게 했다.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다가 그 3명이다. '나 믿지?'라는 이 단순한 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28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정말로 주시면 제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29 그러자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향했습니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자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자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주여, 살려 주십시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했느냐?”
(마태복음 14장 28 - 31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예수께선 믿음이 적은 베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폭풍우를 잠잠케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8. 예수께서는 배 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빠져 죽게 됐는데 모른 척하십니까?”
39.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고요하라! 잠잠하라!” 그러자 바람이 멈추고 호수가 잔잔해졌습니다.
4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장 38 - 40절)

 
마가복음 4장의 사례처럼, 예수께선 폭풍우를 잠재우실 수 있는 권능을 갖춘 분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대신,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베드로가 곤경에 빠진 순간은, 그가 시선을 돌려 바람을 본 순간이다. 바람을 본 순간, 두려움에 빠져 베드로는 허우적댄다. 허우적대며 자신을 찾는 베드로를 예수 그리스도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해주신다. '믿음이 작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라고 질책하긴 하시지만, 어쨌든 구해주신다. 예수께서 빠져 죽어가는 베드로를 질책하며, '거봐라. 나를 계속 봤어야지'하고는 그냥 제갈길을 가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죽어가는 베드로를 구해주셨다.
 
믿는다는 것은 위험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배신당할 위험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대 끊어지지 않을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실 안전한 것이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
(시편 18장 2절)

 
하지만 쉽사리 이 시편의 고백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린 도마처럼 의심이 많고, 베드로처럼 예수를 보다가도, 바람으로 눈을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우리의 믿음을 원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부담감이다. 도대체 왜 이런 부담을 주시는지 때론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믿음은 항상 미지의 영역을 포함한다. 주님께선 우리의 인지 영역을 벗어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이해되지 않는데 어떻게 믿는다는거지? 어딘가 무한굴레에 빠진 것 같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은 바꿔말한다면, 하나님이 실제하신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이해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유한한 것 안에서 무한한 것이 나올 수 없다. 점점 복잡해진다.... 점점 형이상학적으로 빠지는 것 같다. 
 
결국 믿음은 결단의 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분을 믿기로 결단하고 나면, 너무나도 모든 것이 명쾌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실체가 흐려지며, 형이상학적으로 빠지게 된다. 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걷는다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것을 믿는다는 것인가. 내 눈앞에 보이는 저것이 사이비나 이단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의 위험성

믿음은 위험하다. 사이비와 이단의 교리에도 믿음이 있다. 만약 누군가에게 너가 믿는 그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한다면 상대방은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세계관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무너뜨리는것은 그 사람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는것이다. 이것은 강한 부정과 분노를 일으킨다.

[행7:1-54, 우리말성경]
1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사람들이 고소한 이 내용들이 사실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2 이 말에 대해 스데반이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리고 어르신들,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기 전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3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4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으로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손바닥만 한 땅도 아브라함에게 유산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와 그 씨가 이후에 그 땅을 갖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예가 돼 400년 동안 혹사당할 것이다.
7 그러나 그들이 노예로 섬기게 될 그 나라에 내가 벌을 내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이 그 땅에서 나와 이곳에서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8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태어난 지 8일 만에 아들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우리 열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9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셔서
10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집트 왕 바로의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왕은 요셉을 총리로 삼아 이집트와 왕궁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11 그때 이집트와 가나안 온 땅에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겪게 됐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12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그곳에 보냈습니다.
13 그들이 이집트에 두 번째로 갔을 때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밝혔으며 바로도 요셉의 가족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14 이 일 후에 요셉은 사람을 보내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족까지 합해 75명을 불렀습니다.
15 그리하여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가게 됐으며 그와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16 그 후에 그들의 시신은 세겜으로 옮겨져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 무덤은 과거에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하몰의 자손들에게 얼마의 돈을 주고 사 둔 것이었습니다.
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때가 가까워지자 이집트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18 한편 그때 요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왕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됐습니다.
19 그는 우리 민족을 속여 이용해 먹었고 우리 조상들을 괴롭히며 그들의 갓난아기들을 강제로 내다 버려 죽게 했습니다.
20 이때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남달리 아름다웠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동안 그를 집에 숨기면서 기르다가
21 어쩔 수 없이 밖에 버리게 됐는데 이때 바로의 딸이 그를 주워 데려다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22 모세는 이집트 사람들이 가진 모든 지혜를 배웠고 그의 말과 행동에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23 모세가 마흔 살이 되자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24 모세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그 편을 들러 갔다가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이고 원수를 갚아 주었습니다.
25 모세는 자기 동족만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 내실 것을 깨닫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26 그다음 날 모세는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가가 화해시킬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당신들은 같은 형제들인데 어째서 다투고 있단 말입니까?'
27 그러자 싸움을 걸었던 사람이 모세를 밀치며 말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웠소?
28 당신이 어제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는 것이오?'
29 모세는 이 말을 듣자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는 거기서 나그네 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30 40년이 지난 후 한 천사가 시내 산 근처 광야에서 타오르는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31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가 더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에 모세는 두려워 떨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33 그때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34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억압당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 신음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다. 자, 이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낼 것이다.'
35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웠소?'라면서 거부하던 사람인데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던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와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36 모세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면서 이집트와 홍해 앞에서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했습니다.
37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너희 백성 가운데 나 같은 예언자를 보낼 것이다'라고 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38 그는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함께 우리 조상들과 더불어 광야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39 그러나 우리 조상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절하며 그 마음으로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40 그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모세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소'라고 말했습니다.
41 그리고 그들이 송아지를 본떠 우상을 만든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들은 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습니다.
4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돌아서시고 그들이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내게 희생과 제물을 가져온 적이 있었느냐?
43 너희는 너희가 숭배하려고 만든 몰록의 천막과 너희 신 레판의 별을 높이 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바벨론 저편으로 옮길 것이다.'
44 우리 조상은 광야에서 증거의 장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 그가 본 양식에 따라 그대로 만든 것입니다.
45 우리 조상들은 이 장막을 물려받아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땅을 차지할 때도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그 장막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장막은 다윗의 시대까지 그 땅에 있었습니다.
46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으로 야곱의 집안을 위해 하나님의 처소를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47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언자가 한 말과 같습니다.
49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내 보좌이고 땅이 내 발판이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짓겠느냐? 또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 있겠느냐?
50 이 모든 것을 다 내 손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여러분의 조상처럼 계속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52 당신들의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는 당신들도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53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54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공회에 잡혀온 스데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사실 스데반이 한 이 연설은 종교지도자들도 다 아는 사실들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이 모든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루종일 공부하는 구약의 내용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그냥 화나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목이 찢어쳐라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들었고, 그를 돌로 쳐 죽이기까지 했다.

[행7:57, 우리말성경] 그러자 그들은 귀를 막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스데반이 그들을 좀 정죄하긴했지만, 단지 거기서 그친다면 그들은 스데반을 좀 이상한사람 취급하고, 추방하거나 감옥에 가두면된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도 분노해서 스데반을 즉결처형시켜버린다. 스데반이 거짓말을 했는가? 아니다. 그는 오직 팩트만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분노해서 목이 찢어쳐라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든다. 도대체 어떤 지점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는가?
이에 대해 일본의 카톨릭 신자이자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바로 이 구절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행7:47]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위한 집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이 성전은 유대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이 성전을 신성시한다.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전쟁과 자기 목숨도 바친다. 성전은 그들의 전부, 그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이 감히 말하는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다! 스데반의 이 말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말이다. 우리의 거룩한 성전을 더러운 이방종교의 신전이나 우상과 동급취급하다니! 스데반의 이 말을 인정하는것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선조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고 추구한 그 모든것을 무너뜨리는 셈이다. 이것은 눈뜨고 볼 수 없다! 당장 저 교만한 이교도를 돌로 쳐죽이자! 믿음은 위험하다. 믿음을 흔드는것들은 다 없애버려야하는 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성전을 믿는것은 위험하다. 성전을 위협하는 그 모든것을 적대적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부숴버린다면 전세계의 유대인들은 분노를 일으킬것이다.
이것은 굳이 성전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 각자 하나씩을 믿는다. 무신론자도 "신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것은 다르다. 그분을 믿는다는것은, 내가 가진 모든 믿음의 대상들을 다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든것은 없다는 허무주의로 이어지는가? 아니다.
이것은 겸손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스스로 종되어 죽기까지 겸손하셨다.

[빌립보서 2:6-8]
6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8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것은 위험하지 않다. 왜냐연 그분은 스스로 순하고 온유한 어린양이 되어 이 땅에 겸손히 오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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