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장과 멈춤

이렁비니 2024. 8. 13. 12:13

요즘 유행하는 코딩교육학원 등에서 내세우는것은 "많은 공부 및 과제량"이다. 일례로 한 코딩학원은 학원 이름 자체를 "스파르타"로 지었고, 삼성전자에서 운영하는 SSAFY라고 불리는 삼성 청년 SW 아카데미에는 소개 유튜브에 "합격하면 바로 개발자 될 줄 알았는데 고3 뺨치는 공부량?"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삼성전자에서 실시하는 SSAFY 소개 유튜브. 합격한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공부량에 대한 제목이다.

스파르타 코딩클럽학원 로고. 제목에서부터 스파르타를 내세운것을 보면 엄청 빡세게 코딩 과제를 집중적으로 해준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학원이나 코스의 공부와 과제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을 보면 사회가 20대 청년들에게 "성장"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것을 알 수 있다. 아마 빡센 공부량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자, 라는 취지로 해당 영상들의 제목과 썸네일을 달았을것이다.

성장의 공리

"성장"이란 무엇일까? 막연하게 느껴지는 성장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성장의 "공리"를 찾아보자. 공리란, 수학용어로서, 너무도 명확하여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가장 기초적인 근거를 일컫는다. 예를들어 "삼각형의 세각의 합은 180도이다"등이 있을것이다.
아래의 두 전제는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한 내가 생각하는 전제 조건이다.

  1. 현재 나의 상태가 불완전한 상태이다.
  2. 공부 등 어떠한 노력을 하면 미래에는 현재 상태가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현재 나의 상태가 완전하다면 사람들은 굳이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것이다. 또한, 노력을 해도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성장하기를 포기할것이다. 하지만, 해당 두 조건이 공리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장"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공리는,

어떠한 역사의 흐름에는 단계적 발전이 있다.

라는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라고? 맞다. 그렇기에 이것이 공리인것이다. 성장과 굉장히 많이 자주 쓰이는 단어가 "단계", "발전"이다. 이들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성장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이다,

헤겔의 단계와 발전

사실 이러한 기본 공리는 헤겔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헤겔은 시간의 흐름을 일방향성으로 보았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 흐르고, 그 흐름 가운데 일어나는 발전은 변증법적 투쟁을 통해 일어난다. 따라서 과거보다 현재가 더 진보했고, 현재보다 미래가 더 진보할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난다. 이러한 헤겔의 역사관이 가장 잘 드러난것이 게임 "문명"이다.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문명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일련의 테크트리를 통해 자신이 플레이하는 문명을 발전시킨다. 봉건제 기술을 마스터하면 중세시대로 넘어가고, 인쇄술이나 천문학을 마스터하면 르네상스로 넘어가고.. 이런식이다. 따라서 문명은 어떠한 "시대"를 지닌다.
아래는 문명에서 각 시대를 나누는 명칭들이다.

고전시대 - 고대시대 - 중세시대 - 르네상스 시대 - 산업시대 - 현대시대 - 원자력시대 - 정보화시대

이러한 성장의 끝은 어딜까?
게임 문명에서는  "미래시대"라고 이야기하고 대충 넘어간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끝은 어딜까?

역사의 종말

헤겔의 역사관을 따른다면 필연적으로 어딘가 종점에 도달해야만한다.
헤겔은 어떠한 상태가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는 순간, 더 이상의 변화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완전한 상태. 그리하여 더 이상 어떠한 변화가 필요 없을때, 그 때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말한다.

게임 문명에 비유하면, 승리한 순간이다. 문명에는 여러가지 승리조건들이 있다. 시간 승리,  과학 승리, 문화 승리 등등. 어떠한 승리 조건이 달성되면 이것은 게임의 승리, 즉, 종말이다.

헤겔은 아마 장밋빛 미래, 유토피아를 꿈꾸었을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노동자-자본가 간의 계급적 투쟁 대립으로 보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하는 유토피아가 바로 "공산주의 유토피아"였다.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1992년도 저서, "역사의 종언"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계가 승리하였으며, 민주주의 정치가 정치의 최종형태이고, 더 이상 "역사"의 변증법적 이념투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붕괴를 몰락하고 공산주의가 아닌,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정치의 형태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완전무결한 정치체계라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여전히 21세기에도 민주주의의 한계점은 존재한다.
어쨌든 중요한것은 "종말"이 있다는 것이다.
종말은 멈춰야하는 곳이다. 현재까지의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경제는 시장경제체제에, 정치는 민주주의를 최종 종착지로 여기고, 멈춰있는것 같다. 물론 학자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후기자본주의 등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바라본다면 "자본주의"에 멈춰있다.

기독교인이 멈춰야할 곳.

그렇다면 각 개개인,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멈춰야할 곳은 어디일까? 헤겔은 해당 발전 단계를 예술-종교-철학. 이라고 말했다. 예술과 종교를 통해 부분적으로 드러난 진리가, "철학"을 통해 최종적으로 드러났다고 이야기하는것이다. 오직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 비로소 진리가 온전이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헤겔에 따르면 우린 철학, 에서 멈춰야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 또한 "철학"에서 멈춰야할까? 진짜, 기독교라는 종교는 철학으로 넘어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할까?

만약 기독교를 종교로 본다면 그렇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믿는것은 기독교의 형식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가 아닌 "복음"이다. 복음이란, good news, 즉, 좋은 소식이다.
어떤 소식이냐면, 요한복음 3장 16절,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신다는 점. 너무도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는 점.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이다. 아마 갑자기 뜬금없을 것이다. 잉? 왜 갑자기 이 결론이 나오지? 의문일수도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로 도달하는 길은 비약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진리로 가는 길은 단계적 성장으로 보는 듯하다. 예술-종교-철학 등의 단계. 그리고 그는 이 단계를 올라가는 과정을 투쟁으로 보았다. 정반합. 변증법적 투쟁으로 본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다르다. 진리를 깨닫는 것에는 순차적인 단계가 없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포도원 비유에서 먼저 일을 시작한 자나 나중에 일을 시작한 자나 동일하게 같은 품삯을 준 것이다.

[마20:8-10]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따라서 진리는 단계적 접근으로 도달하는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리는 보편적이고, 평등하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순간, 말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9장 30절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분명 다 이루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앞에 있을때, 멈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순간, 다 이루었다고 말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멈춤은 부정적인 멈춤, 멈췄기에 남들이 달려나갈 때, 도태되는 멈춤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 멈춘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 라는 새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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