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슬픔

이렁비니 2024. 8. 16. 10:58
하나님 아버지.... (눈물)... 그리고 아멘.

 
인스타에서 해당 사진을 보았다.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되는 그 기도의 편지는, 정작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떨어진 눈물 자국들.
그리고 마지막에 "아멘"으로만 끝났다. 백마디의 말보다, 몇방울의 눈물자국이 적힌 빈 기도문이 더 감동이다. 어쩌면 내가 "F"여서 그럴수도 있겠다. 하지만,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저 빈 여백에는 어떤 말들이 쓰여지는 기도가 들어왔던 것일까? 우리는 무엇이 쓰여져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오직 몇 방울의 눈물자국만으로 어슴푸레 짐작할 뿐이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

위 말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철학적 논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굉장히 어려워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GPT가 설명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해 설명해본다. 그의 철학은 주로 언어와 논리, 의미에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하나의 그림 또는 모델이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는 문장들은 세계의 사실들을 나타내는 일종의 그림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의자 위에 있다'는 실제 세계에서 고양이가 의자 위에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이처럼 '언어'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표현하고 설명한다.
따라서 언어가 확장되면 우리의 인식 세계도 확장되지만, 언어가 제한되면 우리의 인식 세계도 그만큼 제한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 철학으로 넘어올수록 철학자들은 각자만의 새로운 철학적 '용어'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기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몇가지 리스트를 들어보자.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deconstruction): 
  • 이를 통해 기존의 이분법과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 제시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생체권력’(biopower):
  • 현대 사회에서 권력이 생명 자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제시
  •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 그의 주요 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사용한 용어로, 단순히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
  • 자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 영어의 "difference"와 프랑스어의 "différer"(연기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단순히 차이(differenc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연기되는 과정을 나타냄. 언어가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항상 다른 의미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의미는 항상 차연의 과정 속에서 움직이며, 절대적으로 확정되지 않음.
  • 질 들뢰즈의 '리좀'(Rhizome):
  • 리좀은 식물의 뿌리줄기를 의미하며, 가지가 분기하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비유. 이를 통해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와 달리, 네트워크와 같은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구조를 설명. 전통적인 트리 구조(tree structure)와 대조됩니다. 트리 구조는 중심에서 출발하여 가지가 분기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반면, 리좀은 중심 없이 다양한 지점에서 연결되고 확장되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을 통해 비선형적 사고탈중심화된 구조를 설명.
  • 사르트르의 '나쁜 믿음'(Mauvaise foi):
  •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태도를 설명.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나쁜 믿음의 한 예.
  • 라캉의 '실제계'(Real):
  •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즉 우리가 경험할 수 있지만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징화되지 않은 순수한 경험의 영역을 의미.

등등... GPT에게 물어보니 예시가 너무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이 모든 철학자들이 '언어'라는 기존의 한계를 넘어사기 위해서 계속해서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내었단 점이다. 그로 인해 각각의 의미들에 대해선 점점 더 명확할 수는 있겠지만, 각 개별적 개념들이 너무나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라캉'의 실재계에 대해서 살기 위해선,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 '상징계'가 뭔지 알아야 한다. 상상계의 특징은 헤겔의 정반합의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려면, 헤겔의 절대정신을 알아야 한다. 또한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확장한 것이므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개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는 또 '거울 단계', '대타자'... 등등 다양한 개념들이 새롭게 나온다. '실재계'라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므로 이렇게 복잡한 개념들이 총출동하는 것 같다.

라캉의 '실재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해해야하는 용어들

너무 어렵다. 한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용어를 이해해야 하고, 또 그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용어를 이해해야하고... 무언가 무한한 고리에 빠지게 된 것 같다. 그래도 만약에 여차저차 이 모든 것들을 이해했다고 치고, 한번 위에 적힌 저 눈물 젖은 기도 편지를 나의 뇌절로 라캉의 실재계를 가지고 설명해보겠다. 뇌절이기에 재미로 보고, 나의 해석이 100% 정확하고 전문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적고,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눈물 자국만 묻은 저 편지는, 편지의 화자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신에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라캉의 '실재계'를 경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항상 현대철학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므로, 항상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따라서 '~할 수 있어'로 문장을 끝낸다.) 이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징화되지 않은 순수한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 편지의 화자는 아무것도 적지 못한거야. 실제로 많은 종교적 체험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때 언어가 부족하다고 느껴. 이것은 말로 전달이 되지 않으며, 이는 실재계의 특징인 상징화 불가능성과 관련되어 있어.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은혜'라는 용어로 말하기도 해.
따라서 해당 편지를 쓰던 화자는 기도 편지를 작성하려고 펜을 들었지만, 정작 '하나님 아버지'만 적고, 그 후에 아무것도 적지 못했어. 그리고 눈물만 흘릴 뿐이지. 그리고 마지막에 '아멘'을 기도를 마치며 적은거야.

 
하지만, 이 해석을 본다면 '이해'는 될 수도 있겠지만, 공감? 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편지를 쓴 화자가 어떠한 종교적 체험을 했고, 그 경험을 언어로 담기에는 언어라는 그릇이 너무 작았구나. 정도로 이해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해는 되지만, 위로는 되지 않는다.

위로

그렇다면 이 편지를 쓴 화자의 눈물에 위로를 건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라캉의 논리에 입각하면 온전한 위로는 불가능하다. 해당 편지를 쓴 화자가 표현하는 슬픔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한 슬픔이다. 그러니 언어로 건네는 위로는 언어를 뛰어넘는 슬픔을 위로할 수 없다.
라캉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순수한 경험의 영역인 실재계의 존재는 인정했기에, 어쩌면 위로를 건네기 위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것이다.

"성당이나 교회, 혹은 절 등의 종교시설에 가서 위로를 받아봐."

하지만 이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위로는 오히려 상대의 분노를 불러일으킬것이다. 이렇게 화낼 수도 있을것이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나의 슬픔을 알기나 해? 그런데 무슨 교회에 가라 마라야?

이것은 역효과이다. 종교의 교리를 공부해라, 라고 말하는것 또한 마찬가지. 슬퍼하는 자에게 어려운 교리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감과 위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4일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간다. 죽은 나사로 앞에서 그의 가족들, 마리아, 마르다 등은 슬피 울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는 마음이 비통해 괴로워졌다.
그리고선, 나사로가 어딨냐고 물으시곤, 제자들이 대답한다. "주여 와서 보십시오!"
이 제자들의 대답엔 그들의 원망과 질책이 섞여있는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기 때문이다.

5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녀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6 그러나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6절)

그들은 원망 섞인 눈초리로 예수에게 화를 냈을것이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11:32-34, 우리말성경]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예수를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저희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3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흐느껴 우는 것과 따라온 유대 사람들도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해 괴로워하셨습니다.
3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어디에 뒀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와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와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죽기전에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마리아는 원망하는것같다. 다른 유대 사람들도 질책하고 원망하는것 같다. 그 모든 질책과 원망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반응은, 위로가 된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더라.
Jesus wept.
(요한복음 11장 35절)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영어로는 단 두 단어이다. Jesus wept.이 간결하고, 단순한 이 두 단어가 그들을 위로한다.
Jesus wept. 예수께서 우시더라. 요한복음의 이 문장은, 언어를 뛰어넘은 위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것을 라캉의 실재계로 해석하는 순간, 그 모든 위로는 사라진다. 이 간단하고도 명료한 이 한 문장, "Jesus wept." 이 문장은 오로지, 복음일때 위로를 건넨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눈물을 흘릴때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울고 계신다는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본 유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요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들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는다. 예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을때, 그리고 그분이 우리가 눈물을 흘릴때,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것을 깨달을 때, 우린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깨닫는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쓰여진것이 아니다.
상징계니, 즉자, 대타자, 현존재, 해체...  등의 어려운 용어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단순해서 어린아이도 알 정도이다. 예수께서 우신다. 이것은 유치원생도 알아들을 언어이다. 하지만 이것은 언어를 넘어서는 위로를 건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사랑을 깨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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