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특히 대한민국에 사는 현대인들은 엄청 바쁘다. 기본 주 40시간 근무에, 추가적인 야근과 잔업, 때때로 있는 주말출근까지.
그리고 시시때때로 재테크와 부동산 시장도 공부하며 미래도 준비해야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추가적으로 '갓생'을 살기 위해서 퇴근 후 헬스와 영어 공부, 자기계발까지, 끝없는 성장을 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안그래도 바쁜 이들에게 더 큰 짐을 지우는 것 같다. 모처럼 쉴 수 있는 일요일, 아침부터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여름에는 여름성경학교,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이벤트, 봄에는 부활절... 등등 수많은 행사들을 만들고, 그 행사들을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사역에도 참여하라고 종용한다. 이는 특히 교회 청년부에 자주 벌어지는 문제점으로 보인다. 교회 업무들이 몇몇 열성적으로 나오는 성도들에게 편중되다보니, 그들은 과도한 업무량에 의해 부담감을 느낀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이처럼 안그래도 바쁜 현대인들을 교회는 더 바쁘게 만든다. 도대체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의 짐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30절: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짐진 자들을 불러모은다.
그의 주변에는 지치고 힘든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고,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고, 병들고 지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피로에 지치고 힘든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가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은 그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들고 지친,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떠한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가 드디어 이 '짐'을 벗어버릴 비법, 혹은 비밀을 가르쳐주려나보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은 그들의 예상을 깬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들은 어쩌면 실망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진 짐을 떠넘기거나, 짐을 없애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왔는데,
그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지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멍에를 벗고 노예와 같은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멍에를 하나 더 씌우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짜증날 수도 있는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에 짐을 하나 더 얹게 된다면,
진짜 짐에 깔려 꼼짝도 못할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란 작자는 내가 이 짐이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못하길 바라는 건가!
사실, 그렇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우리의 번아웃을 바라는 것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정하기를 바라신다. 너가 메고 있는 이 멍에, 짐은 너의 힘으로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시지프스 신화 의 '돌덩어리' vs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제우스에게서 끊임없이 돌을 언덕 위로 굴려 올려야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가 겨우 꼭대기로 돌을 굴려올리면 돌은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시지프스는 다시 처음부터 돌을 굴려올려야 한다.
시지프스는 끊임없이 돌을 굴려올려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시지프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시지프스에게 엄청나게 무거운 바윗덩어리 짐을 지게 만든다. 이 지점만 따지고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
무거움으로 따졌을 때, 제우스가 시지프스에게 주는 돌덩어리,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둘 중 어떤 것이 더 무거울 까?
정답은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돌덩어리는 적어도 인간의 힘으로 굴려올릴 수 있다. 시지프스가 그래도 언덕위로 굴려올릴 수 있는, 즉, 감당할 수 있는 짐을 제공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아니다. 십자가라는 '짐'은 너무나 무겁다. 너무나 무거워서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들 수 없다.
그래서 우린 우리의 힘으로 십자가를 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린 십자가 앞에서 실족하게 된다.
시지프스의 돌덩어리는 인간의 의지와 무의미함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내는 인간의 강인함을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반대이다. 여기 앞에서는 인간의 어린아이와 같은 나약함과 무력함을 마주한다.
이렇게 따지면 제우스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심한 형벌을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예 불가능한 미션을 우리보고 하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제우스는 시지프스에게 형벌로서 돌덩어리를 주었다. 따라서 시지프스에게 짐을 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러니 그는 끊임없는 형벌 안에 갇히게 된다.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주어진 이 끊임없고 무의미한 형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르다. 그는 말한다.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는 형벌로서 이 끔찍하게만큼 무거운 짐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지프스의 돌덩어리와 가장 큰 차이는,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메지 않을 선택의 자유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형벌이 아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메지 않는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형벌로서 이 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수고하고 짐진 자들을 쉬게 하기 위해 주는 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문이 들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너무나도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 쉬게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다.
이 의문에 답하기 전에, 시지프스의 돌덩어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번 표로 서로 비교해보자.
시지프스의 돌덩어리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 | 상대적으로 가볍다. 그래도 인간이 들 수 있는 무게이다. | 무겁다. 너무나도 무거워서 인간이 들 수 없다. |
앞에서 무엇을 마주하는가? | 인간의 의지, 강인함 | 인간의 나약함, 무기려함 |
짐을 지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 | 없다. 제우스가 일방적으로 지게 만든 짐이다. | 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을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 |
형벌인가? | 형벌이다. | 형벌이 아니라 '쉼'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쉼인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가졌을 것이다. 의문을 품은 수많은 얼굴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이어서 말한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하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겁다. 너무나도 무거워서 인간이 들 수 없는 짐이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나의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이것이 무슨 말일까.
먼저 여기서 '쉽고'의 어원을 살펴보자. '내 멍에는 메기 쉽고'에서 '쉽고'라는 헬라어 어원은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이다.
χρηστός라는 이 어원에는 '유익한'이란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는 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쉬울 뿐 아니라, 유익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짐은 유익한 것일까?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대한 질문을 답해야 한다.
'무거운 짐을 없애는 것' vs '무거운 짐을 가볍게 드는 것'
두 가지 기술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 '무거운 짐'을 가볍게 드는 기술이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짐을 들지 않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짐을 들기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짐을 아예 안 드는 선택지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드는 선택지에 비해서 너무나도 쉽다. 왜냐하면 그냥 짐을 들지 않는 것을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려운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우린 그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분명 이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거워서 우리는 이것을 질수 없다고하지 않았는가?
맞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질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와 함께 이 십자가를 지고 동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아예 이 십자가를 지지 않는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된다면 함께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에서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의 짐을 지고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라도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시기 바라기 때문이다.
시지프스 신화 속 제우스 vs 예수 그리스도
시지프스 신화 속의 제우스 신의 모습은 너무도 잔인하다. 그는 산꼭대기에 가만히 서서, 시지프스가 겨우 겨우 돌을 굴려 정상에 가져다놓으면, 단 한 순간의 손짓으로 그 돌을 시작지점으로 돌려놓는다. 따라서 시지프스의 제우스는 너무나도 인간에게 잔인하리만큼 무심하다. 그에 따라 인간은 끊임없는 돌을 굴려올려야하는 형벌에 빠진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분은 시지프스의 제우스처럼 정상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함께 이 십자가를 지길 원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시고, 기꺼이 우릴 위해 대신 그 십자가를 지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것이라곤 간단하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것. 그리하여, 너희는 나의 짐을 지고, 나의 멍에를 메라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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