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다리를 짓는다는 것.

이렁비니 2024. 9. 2. 02:44

'어린왕자'로 유명한 생택쥐페리가 쓴 소설, '야간비행'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한 기술자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공 우편국 지배인인 리비에르의 대화 내용이다. 
 

언젠가 다리를 건설 중인 공사장에서 부상자 한 명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기술자가 리비에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다리가 처참하게 뭉개진 부상자의 얼굴만 한 가치가 있을까요?"

그 다리를 이용할 그 어떤 농부도 인근의 다른 다리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한 사람의 얼굴을 짓이겨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들은 세워진다. 기술자는 덧붙여 말했다.

"전체의 이익은 개개인의 이익이 모여 이루어지죠.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않아요."

한참 후에 리비에르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생명을 넘어사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요... 그런데 그게 무엇일까요?"
-생택쥐페리 '야간비행' 중.-

 
도대체 다리는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다리가 세워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이익을 볼 것이다. 그 다리가 지어짐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근의 다리로 멀리 돌아가는 수고를 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수고를 더는 행위가, 한 사람의 얼굴을 짓이기는 것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다리를 짓는 것에는 도대체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다리의 가치.

다리를 짓는다는 것은 분명 어떠한 가치가 있다.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마진 콜'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2008년 월스트리트의 한 금융 회사. 리스크 관리팀의 팀장인 에릭은 과거에 '다리'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는 현재는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나, 구조조정에 의해 해고당한다. 하지만 그가 금융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제점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사는 그를 다시 복직시키기 위해 직원들을 그에게 보낸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직원들에게 다리를 짓던 과거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한다.
 
 

에릭: 내가 다리를 세웠단 거 알아?
윌: 네?
에릭: 다리 말이야.
윌: 몰랐는데요.
에릭: 원래 엔지니어였어.
오하이오주에서 웨스트 버지니아를 잇는 다리였어. 길이가 300m 정도야. 하루에 12,100명이 사용하지.
뉴 마틴스빌과 윌링 간의 거리를 편도로 57km나 단축시켰어. 전부 합치면 하루에 135만km야. 
한달로 치면 4천만 km인 셈이지. 그리고 1년으로 치면 4억 9천만km야. 그걸 단축했어.
1986년에 세웠으니까 22년 전이군. 
그러니까 그 다리가 세워진 이후, 107억 9천5백만km의 거리가 단축된 셈이지.
시속 80km라고 치면 얼마냐... 그러니까... 134,164,800 시간이군. 
아님, 559,020일이거나.
그 다리 하나가... 전부 다 합치면 1,531년을 절약해준 셈이야. 어마어마한 세월이지. 1,531년이라니까.
윌: 엄청나네요.
- 영화 '마진 콜' 중. -

 
다리가 하나 세워짐으로 인해 1,531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절약해준 셈이다. 과거 다리를 만드는 기술자였던 에릭은 현재 금융파생상품을 파는 한 회사에서 리스크 관리팀 팀장으로 일한다. 그리고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 그가 일하는 금융회사는 사람들에게 이미 휴지쪼가리가 된 '파생상품'을 판다. 한마디로 '폭탄 떠넘기기'를 하는 셈이다. 이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경제적 파산을 하게 되지만, 회사는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된다. 이 사례에 비교한다면, 다리를 건설한다는 것은 꽤나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1,531년을 절약하게 만들어준 다리는, 한 사람의 얼굴을 짓이겨버릴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다리가 실용성 뿐 아니라, 미학적, 혹은 문화적으로도 뛰어난 다리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금문교'(골든게이트)라면? 얼굴이 짓이겨진 인부는 이름이 없는 무명의 인부이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관광지이자 랜드마크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 골든게이트 브릿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샌프란시스코의 교통체증을 줄이기 위해 다리 건설을 지시했고, 1937년 금문교가 완공되었다.
다리가 완공되는 과정에서 총 11명의 인부들이 사망했다. 1937년 2월 17일 전까지 1명이 사망했고, 2월 17일날 비계를 옮기다가 12명의 인부들이 안전그물을 뚫고 떨어졌으며 총 10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아래는 금문교 홈페이지에 나온 사망자들의 명단이다.

October 21, 1936: Kermit Moore
February 17, 1937: O.A. Anderson; Chris Anderson; William Bass; O. Desper; Fred Dümmatzen; Terence Hallinan; Eldridge Hillen; Charles Lindros; Jack Norman; and Louis Russell.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 있는 건설 중 사고로 사망한 인부들을 추모하는 추모비이다.

그렇다면 금문교의 가치는 11명 인부의 목숨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들을 추모하는 추모비에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Supreme Sacrifice'(위대한 희생)이라고 적어두었다. 영화 '마진 콜'에서 나온 에릭은 1986년에 한 이름없는 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다리는 1,531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렇다면 1937년 지어진 금문교는 도대체 몇년을 절약한 것일까! 금문교는 시간을 절약했을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이자,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렇다면 금문교는 한 사람의 얼굴 쯤을 짓이겨도 된다는 것일까?
생택쥐페리의 야간비행에서 리비에르가 한 대사를 다시 곱씹어보자.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생명을 넘어사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요... 그런데 그게 무엇일까요?"

 
마진 콜의 에릭이 만든 다리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다리는 훌륭한 일을 했다. 하지만, 이정도까지는 사람의 목숨과 비교한다면 작은 가치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어떠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금문교 정도면 전세계적인 랜드마크이므로 시대를 초월한 어떠한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다리 이상이다. 이것은 미국 서부를 상징하는 하나의 심볼이다.그렇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목숨보다 가치있는 것일까? 
 

시간을 초월한 가치?

이 질문에 대해, 한 인스타그램의 댓글로 다음과 같은 답을 보았다.

시간을 넘어선 이익.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잊혀지지만 전쟁 속에서 태어난 과학기술,
정치.사회적 변화, 문화유산 등은 영원히 기억되고 의의를 남긴다.
오랜시간 동안 남아 후세대에게 영향과 영감을 줄 수 있느냐가 인간 한 명의 목숨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뭔가 좀 찝찝하긴 하지만, 이 대답을 반박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에서 어떠한 불멸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장 '민주주의'라는 가치만 봐도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민주주의가 발전되었다. 만약 '다리'라는 단어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로 바꾸면 어떨까?
다리를 짓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것이 더 큰 가치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리비에르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처참하게 뭉개진 부상자의 얼굴만 한 가치가 있을까요?"

 
만약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잘 안 와닿으면 다른 가치로 바꿔도 상관없다. 일제로부터의 식민지 독립, 혹은 평등사상? 등등...
해당 질문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다리'의 경우보다는 더 많을 것이다. 
이 관점은 내 생각에는 헤겔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어떠한 거대하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정신'(혹은 시대정신)에 관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역사란 세계정신이 자신을 전개해 가는 과정이다.

 
헤겔이 살던 시기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였다.  당시 헤겔이 살던 독일은 강력한 봉건적인 사회질서체계여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민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헤겔은 나폴레옹을 단순히 정복자로 본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정신의 화신으로 보고,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보고 말했다. '나는 말을 탄 세계정신을 보았다.'
 
나폴레옹을 환영한 것은 헤겔 뿐만이 아니다. 베토벤 역시,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그 유명한 교향곡, '교향곡 3번, '영웅''을 썼다. 베토벤은 지독한 공화주의자였으며, 그는 나폴레옹이 유럽의 군주제에 맞서 유럽의 민중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줄 인물이라고 믿었다. 
비록,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베토벤의 꿈을 좌절되었지만, 만약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정말 말그대로 유럽의 민중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 줄 인물이라면, 베토벤의 판단은 옳았을까?
 

나폴레옹이 '자유, 평등, 박애'를 유럽에 가져다줄 영웅일 것이라 믿은, 베토벤. 그는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교향곡 3번, '영웅'을 작곡한다.

 
헤겔이나, 베토벤의 이러한 관점은 쉽사리 반박하기 어렵다. 전 유럽에 어떠한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한 사람의 목숨은 희생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냥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위대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어떠한 숭고한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한다면, '다리를 짓기 위해서 한 사람의 얼굴을 짓뭉개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라면, 숭고한 희생을 할 수 있지.'
우리는 이 생각에는 사회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현충일을 기리는 등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납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납득

만약 대통령이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추모사를 할 때,
'OOO의 죽음은 인류의 진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우린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영원히 기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대중들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가족이라면 납득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소설, '야간비행'에서 야간 우편배달을 하는 비행기 조종사들은 목숨을 건 항로 개척을 한다. 그들의 모습엔 어떠한 '숭고함'이 느껴진다. 이 소설이 쓰여진 1930년대는 야간비행이 굉장히 위험한 비행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악천후와 사투를 벌여야하는 것이다. 비행기 조종사 '파비앙'의 아내는 이제 곧 야간비행을 떠나는 잠든 남편을 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한 시간 후면 한 도시의 운명과도 같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책임진 그 팔이 유럽선 우편기의 운명을 걸머질 것이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남자만이 그 기이한 희생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런 생각에 그녀는 우울해졌다.
그는 그녀의 온화한 품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녀가 그를 먹이고 보살피고 보듬어준 것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곧 그를 앗아갈 이 밤을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전투와 불안과 승리를 위해서 말이다... (소설, '야간 비행' 중)

 
그리고 야간비행에서 파비앙은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다. 소식이 끊겼고, 이미 파비앙은 죽었음이 확실시 된 상태이다.
이 소식을 듣고, 파비앙의 아내가 리비에르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파비앵의 아내가 면담을 요청했다. 견디다 못해 찾아온 그녀는 직원들의 방에서 리비에르를 기다렸다....(중략)
이 여인에게도 역시 파비앵의 죽음은 내일이 되어서야 겨우 시작될 것이다. 이제는 헛된 일이 되어 버린 그 모든 행위와 물건들 속에서 파비앵은 천천히 그녀의 집을 떠나갈 것이다. 리비에르는 그녀에 대한 연민을 내색하지 않았다.
"부인..."
젊은 여인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듯 거의 겸손하다고 할 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중략)
로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장님... 그 부부는 결혼한 지 육 주 밖에 안 되었답니다..."
"가서 일하게." (소설, '야간 비행' 중)

 
그들은 야간우편비행 항로를 개척하는데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 사명에 대해 과연 파비앵의 아내가 어디까지 납득할 수 있을까?
아마 그녀가 납득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실은 아마 항공 우편국 지배인인 리비에르도 알 것이다. 그러니 그는 생각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의 죽음은 내일이 되어서야 겨우 시작될 것이라고... 남겨진 그의 유품들이 하나씩 정리되며 그제야 조금씩 천천히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납득할 것이라고... 납득은 어렵다. 그렇다면 그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납득이 아닌 긍휼과 위로.

예수께서는 그를 찾아온 이들을 납득시키려하지 않았다. 그는 베데스다의 38년된 중풍병자에게 '당신이 38년씩이나 중풍에 걸려 누워 꼼짝 못하는 이유는 내가 당신에게 기적을 행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나를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께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더 정확히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로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고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36절)

 
예수께선 죽은 나사로를 위해 애통해하는 이들에게 '나사로가 죽은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나사로가 죽었음은, 다시 살아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울었을 뿐이다. 그가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셨다.
 

예수께선 우셨다.
(요한복음 11장 35절)
 

나사로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적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백부장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종이 아픈 이유는 내가 그를 낫게 해서, 나의 기적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위로를 건네시는 예수 그리스도셨다.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이 다리가 처참하게 뭉개진 부상자의 얼굴만 한 가치가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능력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킬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납득시키지 않으셨다. 대신, 이 질문을 하는 그 사람의 아픔을 고쳐주셨다.
 
헤겔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부상자의 희생은 숭고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은, 이름없는 무명의 개인은 역사가 흐르며 잊혀지지만, 이 다리와 같은, 시간을 초월한 어떠한 가치는 영원히 기억되고 의의를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부상자의 희생은 이 다리가 세워지고, 후대까지도 남아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해당 질문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단 한가지는, 예수님께서는 그 얼굴이 처참하게 뭉개진 그 부상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저는 정말로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단 한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 얼굴이 뭉개져버린 부상자를 가치있다 여기시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선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답이 될 수 있을까? 글쎄... 어디까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해당 답변에 납득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말은 애초에 납득을 목적에 두고 말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 어떤 상태이든,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이 사랑하신다는 그 말은 납득이라기보단, 위로이다.
그러니 예수께선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4절)

 
그는 애통하는 자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민국의 독립

일제강점기 시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대한의 '독립'이라는 거대하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까? 아마 그런 이들을 소수일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당신 주변인들의 죽음은 대한독립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라고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의 한국에서 온 이들이 위로를 건네준다면 이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실제, 그 당시를 살았던 윤동주는 마태복음 5장의 내용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시를 적었다.

윤동주의 시, '팔복'. 1940년, 일제강점기의 암흑기 때 쓰여졌다. (우) 윤동주 '팔복'의 육필 원고. 썼다가 지운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구절만 8번이 반복된다. 대한민국의 여성 소설가,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선 해당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그것보다 정말로 인상 깊은 것은 시인 자신이 거듭 퇴고한 흔적과 그가 지녔던 마음의 풍경이 생생히 드러난 낙서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원고의 모습이었다... (중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그렇게 거듭 반복한 시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깊은 탄식이었다. 슬퍼함의 대가는 슬픔뿐인 현실을 그는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썼다.
'저히가 슬플 것이오.'
그러나 시가 아무리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하는 수단이라고 해도 그렇다. 막상 써놓고 보니 그 절망이 그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전혀 없음이 너무도 고통스럽다. 그는 탈출을 생각한다. 펜을 들어 긴 줄 두개로 지운 다음 새로 써넣는다.
'저히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
그러나 이 문장은 먼저 문장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한다. 슬퍼하는 자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없음을 그는 나날의 삶에서 철두철미 확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이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은 너무도 헛되어 오히려 더 아프다. 빈 독 안을 휘도는 바람 소리보다 더 공허한 그 문장을 도저히 견디어낼 수가 없다. 그는 다시 펜을 든다. 그 헛되고 부질없는 약속 슬퍼하는 자를 기만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을 더하게 할 뿐인 그 허망한 약속을 두 가닥 검을 줄로 지운다.
그리고 한 칸 뒤 공간으로 물러간다. 그렇게 떨어진 자리에서 그 여덟 가지 유형의 '슬퍼하는 자들'에 대해서 다시 묵상한다. 그는 결국 재확인한다. 그렇다.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결국 슬픔뿐이었다. 그는 펜을 들어 적는다.
'저히가 오래 슬플 것이오.'
그러나 역시 흡족하지 않다. 그 문장이 자신이 느끼고 있는 슬픔과 절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함을 절감한다. 그는 다시 펜을 들어 줄을 그어 '오래' 두 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써 넣는다. 永遠히(영원히).

'저히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

八福

마태복음 5장 3-12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히가 슬플 것이오
저히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
 
저히가 오래 永遠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의 이 시는 비록, 암울한 일제강점기란 현실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선 우리가 슬퍼할 때마다,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슬퍼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해석한 송우혜씨는 이것을 가없는 슬픔으로 보았지만,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것을 永遠한 위로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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