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염려를 해소하는 법

이렁비니 2024. 9. 8. 01:06

다음의 내용은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책,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중, 2부, '새와 백합에게서 배우라'는 책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해당 내용은 마태복음 6장 24 - 34절의 말씀을 통해 염려하는 자에게 복음이 건네는 위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중, 2부. 새와 백합에게서 배우라


 

걱정과 불안이 많은 자에게 어떻게 하면 그가 가진 '염려'를 덜 수 있을까?

염려로 가득한 자에게 만약 누군가가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위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염려하지 마세요"라는 말 안에는, '현재 염려가 없는 나처럼 염려하지 마세요'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은, "힘을 내세요"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로, "나처럼 힘을 내세요"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염려하는 자에게 이러한 말은 '동정'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 만큼이나, '동정'도 염려하는 자를 상처주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일까? 도대체 어떻게 염려하는 자의 염려를 덜어줄 수 있단 말일까?

 

염려하는 자에게 모범이 되는 비교 대상 '새'와 '백합'

이 염려를 덜기 위해서 복음은 '새'와 '백합'에게서 배우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되어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장 24 - 34절)

 

'침묵'으로 위로하는 새와 백합

마태복음 6장에서는 '염려'하는 자에게 2가지 '모범'이 될 만한 비교대상을 제공하고 있다.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이다. 일반적으로 '비교 대상'은 염려하는 자를 더 염려로 빠트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라는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에 대한 예시로, 욥기 2장의 일부를 보자.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욥을 찾아간다. 하지만 막상 욥을 마주한 그들은 할말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로 욥을 위로하기에는 욥이 현재 겪고 있는 이 부조리한 고통과 고난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7일 동안 욥과 함께 있으며,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기 2장 11 - 13절)
욥의 고난  >  언어의 한계

 

따라서 욥의 친구들은 욥을 마주한 순간, 그의 고통이 심함을 보고 7일 동안 침묵으로 위로한 것이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이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욥과 욥의 친구들 간에는 오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욥의 친구들은 '언어'로 욥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욥 또한 스스로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언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 대해서, 공중의 핀 새와 들의 백합화는 '언어'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침묵'으로 위로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염려하는 자로 하여금, 시선을 본인에게서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로 옮기게 한다.

나로 향하던 시선이, '공중의 새'를 통해서는 위를 향하게 되고, '들에 핀 백합화'를 통해서는 아래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는 염려하는 자의 눈물을 닦아준다.

눈이 백합을 내려다보는 동안 눈물이 마를 때, 눈물을 닦아 준 것이 백합인 것 같지 않습니까! 새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바람이 눈물을 마르게 할 때, 눈물을 닦아 준 것은 새인 것 같지 않습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눈물을 닦아 준다 해도, 염려하고 있는 당신의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흐른다면, 그것은 정말로 눈물을 닦아 준 것일까요? 그러나 누군가 염려하는 자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만 있다면, 바로 그가 눈물을 닦아 준 것입니다. (새와 백합에게서 배우라 124p)

 

누군가 위로를 찾고 있다면, 들의 백합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저 밖을 보십시오. 하늘의 새가 자유롭게 노니는 저 위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깨지지 않는 침묵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만물은 괴로워하는 자를 위한 순전한 설득입니다.  
(새와 백합에게서 배우라 43p)

 

'사람'인 것에 만족하게 하는 새와 백합.

그렇다면 한가지 더. 새와 백합은 어떻게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를 넘어서 '모범'이 될 수 있을까? 

'백합'은 '백합'인 것에 만족한다. 들에 핀 백합화는 자신이 왕관초나 장미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해서 키르케고르는 <백합의 우화>를 예시로 든다.

<백합의 우화>
한 백합에게 새가 찾아온다. 이 새를 보고 백합은 충격을 받는다. 새는 같은 장소에 머물러있을 필요가 없다니! 새가 그렇게 변덕스러울 수 있다니, 이것은 백합에게 충격이었다. 새는 다른 장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곳에는 다른 백합이 있다, 거기에는 기쁨과 황홀이 있다, 향기가 가득하다... 이러한 새의 이야기는 백합에게 망신을 주었 다. 결국 백합은 새의 노래를 들을수록 더 염려하게 되었다. 결국, 백합은 생각한다. ‘작은 새가 내게 보잘것없다고 말한 대로 내가 그 정도로 보잘것없고, 그 정도로 열등하다니! 왜 내가 다른 곳에 다 른 환경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왕관초가 되지 못했을까?’

백합은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염려를 추방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설득 하는 식의 이야기이다. 결국 백합은 새에게 부탁하여, 새는 부리로 백합을 흙에서 뽑아낸다. 그리고 새는 백합을 데리고 날아간다. 그러나 백합은 가는 도중에 말라죽고 만다. 이것은 염려하는 백합이 백합인 것에 만족했다면, 거기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 백합은 바로 이 백합,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도 못했다’라는 그 백합이 될 수 있었다.

 

들에 핀 초라한 백합화가 백합인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인 것에 만족할 때, 그 염려는 사라진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사람'인것에 만족한다니? 백합이 백합인것에 만족하고, 새가 새인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인것에 만족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혹자는, '당연히 사람인것에 만족하죠! 무슨 헛소리에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참으로 사람들은 사람인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사람'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초라한 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기'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창조하기는 커녕, 스스로 도울 수도 없는 피조물이 되는 것에 만족하기.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초라한 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키르케고르는 솔로몬과 나사로를 비교한다. 솔로몬은 모든 영광을 입었고, '사람'이 아닌, '폐하'(Majesty)로 불린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에게는 그 어떠한 사회적 지위도 없으며, 그를 대변해줄 그 어떠한 신분도 없다. '사람'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모든 사회적 직분(직업, 계급, 신분... 등등)들이 사라졌을 때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는 실존적 용어이다. 

무신론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사람'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벌거벗은 알몸뚱이들은 작고 초라하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 니체의 경우는 '의지'를 통해, '초인'(위버맨쉬)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들의 대전제는 실존적 자아는 의지를 통해 깨부숴야하는, 그런 부정적인 존재라는 인식이다.

하지만, 유신론 실존주의자인 키르케고르는 이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벌거벗은 알몸뚱이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솔로몬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왕실의 자주색 예복을 입고 있을 떄, 그의 모든 영광으로 왕좌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있을 때, 그때 또한 거기에는 관례적인 호칭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이 ‘폐하’(Majesty)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호칭의 가장 엄숙한 용어가 진지함의 영원한 언어로 사용되어야 할 때, 우리는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가장 비천한 자가 나사로처럼 알 수 없는 가난과 궁핍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사람”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합니다. 사람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두 개의 다른 갈림길에서 선택해야만 할 떄, 우리는 그에게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다양성들이 제거되어야 할 때, 우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경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호칭의 가장 고차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양성보다 더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위로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와 백합에게서 배우라)

 

좀 더 재밌는 예시를 들어보자. 로마 제국에서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한번 보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후, 그의 풀네임은 다음과 같다.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디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신의 아들이자 존엄한 사령관 카이사르"

 

사람 이름 하나에 엄청나게 많은 의미들이 덕지덕지 들어가있다. 

  • Imperator: 사령관. 이후 이 단어는 영단어 '황제', 'emperor'로 변형된다.
  • Caesar: 카이사르. 자신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예임을, 카이사르로부터 입양된 자식임을 나타냄.
  • Divi Filius: 신의 아들. 이것은 훌륭한 '프로파간다' 도구로 쓰였다.
  • Augustus: 기원전 27년, 그가 안토니우스와의 '악티움 해전'을 승리한 후, 로마 원로원이 그에게 부여한 영예로운 호칭이다. 

이에 비해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이름은 어떤가.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누가복음 16장 20-21절)

 

그는 그냥 '사람'이다. 나사로라는 이름 어디에도 존엄하다거나, 사령관, 혹은 황제... 등등의 호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버려지고 헌데 투성이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을 귀하다 한다. 도대체 왜? 

왜냐하면 이것은 백합이 백합으로 남는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새가 새인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으로 남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합이 백합인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새가 새인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 초라한 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기,
스스로를 창조하기는 커녕 스스로 도울 수도 없는 피조물이 되는 것에 만족하기.

 

새와 백합에게서 배운 것을 적용하기

복잡할 수 있으니 지금까지 얘기한 것을 정리해보자.

  • '언어'로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
  • 새와 백합에게서 '침묵'을 통한 '위로'를 받는다.
  • 새가 새인 것에 만족한 것처럼, 백합이 백합에게 만족한 것처럼,
    사람이 사람인것에 만족하기.
  • 사람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작고 초라한, 너무나도 연약해서 스스로를 창조하기는 커녕,
    스스로 도울 수도 없는 피조물이 되는 것에 만족하는 것.

이제 마지막 단계이다. 

그렇다면, 새와 백합에게서 배운 것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은 새나 백합과 같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새와 백합은 염려에 대해 '무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무지해진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새와 백합은 염려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염려'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염려'를 의식할 수 있고, 염려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장 34절)

 

새와 백합은 하나님을 닮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새와 백합처럼 살게 된다면, 이것은 완전해진다. 도대체 어떻게? 라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한다. 이것은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무언가가 아닌, 바로 '사람'임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nothing)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nothing'이 된 존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들은 담대하게 '무지해질 수 있다'.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라도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을까?  (18) 2024.10.07
종교는 철학에 뒤쳐지는가?  (10) 2024.10.06
느헤미야  (1) 2024.09.03
다리를 짓는다는 것.  (3) 2024.09.02
믿음  (5) 2024.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