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로 총 4대에 걸친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전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쳤으며, 2022년에는 AppleTV에서 드라마로 제작이 되기도 했다. 윤여정, 이민호, 김민하 등의 배우들이 배역을 맡으며 드라마 또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해당 소설과 드라마의 줄거리와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은 다른 블로그에서도 다루고 있으니, 이 포스팅에서는 먼저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만을 자세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역사가 우릴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 역사
좋은 소설은 좋은 첫문장으로 시작한다. 첫문장이 강렬하면 그 소설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명작 소설들이 훌륭한 첫 문장을 가지고 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라'(모비 딕), 이 몸은 고양이로다. 이름은 아직 없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한 사람만 빼고.(피터팬), 무릇 천하의 대세란 오랫동안 나뉘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다면 반드시 나뉘게 된다.(삼국지연의) 등등... 이 소설 '파친코'도 마찬가지다. '파친코'는 굉장히 강렬한 첫문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이 소설을 적기 위해 구성부터 탈고까지 무려 3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분명 작가는 엄청 고심해서 자신의 소설 첫 문장을 썼을 것이다. 그만큼 이 문장은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를 관통하고 있다.
역사가 우릴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것이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이제 이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자. 문장은 '역사'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먼저,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일까? 재밌는 것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다. 그들은 '역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적 배경은 분명 일제강점기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역사'로 배운다. 1910년은 경술국치의 해로, 일본에게 국가의 주권을 침탈당한 암울한 해라고 배운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한일합병은 그들의 인생에 크게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1910년, 훈이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훈이의 어부 아버지와 어머니는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한, 신체 건강하고 검소한 시민일 뿐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썩어빠진 통치자들이나 무능한 양반들하곤 아무 상관이 없었다.
(파친코 1권, 12p)
역사시간때 배운 1900년대의 한국사는 어떤가.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관이 박탈당하고, 1910년엔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지며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고 배운다. 맞는 말이다. 이것이 '역사'이다. 어떤 연도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열하면 그것이 연표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이들에게 과연 중요했을까. 아니다. 강화도조약이니 을사조약이니 하는 역사시간때 배우는 비극들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먼나라 이야기였다. 전혀 피부로 와닿지 않는 것이다.
헤겔의 '역사'
헤겔은 '역사'를 거대한 틀로 보았다. 그는 '역사란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 과정'이라고 말한다. 말이 조금 어렵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그가 살던 시대상을 살펴봐야 한다. 그가 살던 당시는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였다. 그당시 나폴레옹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변국들을 점령하면서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심어주었다. 여태껏 사람들에게 자유니, 평등이니 등의 이념은 그저 둥둥 떠다니는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난생처음으로 이러한 '이념'이 구체적으로 현실세계에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나폴레옹을 이전의 다른 일반적인 정복자들과 다르게 본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 등은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니 실체가 없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정복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들이 구체화되는 것을 헤겔이 목격한 셈이다. 이것을 헤겔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듯하다. 그는 이런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이런 추상적 개념을 '세계정신'이라고 정의했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보며 '나는 세계정신(혹은 절대정신)을 보았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정복활동은 인류가 자유주의 사상을 확장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바라본 역사는 이러한 '세계정신'이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 중에 역사 속 위인인 나폴레옹 등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조금 어렵다. 왜냐하면 '세계정신'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쉽게 풀이하자면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세계정신'을 일단 '이념'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헤겔이 말하는 '역사'는 여러 이념들이 점점 더 확산해나가며 발전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바라본다면, 아마 '민주주의의 발전과 확산'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해방에서 임시정부 수립, 6.25를 거치고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헌법, 12.12군사 쿠데타부터 5.18 광주, 6월민주항쟁... 등등. 이 과정들을 요약하자면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발전해온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란 세계정신이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이러한 헤겔의 역사관에 우리나라 현대사를 대입시킨다면,
우리나라 현대사는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확산되는 과정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이 바라보는 이러한 '역사'엔 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각 개개인인 우리는 '세계정신'이라고 하는 추상적이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개념에 희생당한다. 확률적으로만 따져보아도, 우린 나폴레옹으로 태어날 확률보다 나폴레옹의 이름없는 13425번째 졸병으로 태어날 확률이 더 높다.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확산시킨다는 대의적 명분 아래에 이름없는 졸병으로 죽어갈 확률이 더 높다. 조금 더 쉽게 말하기 위해 비슷한 시대상을 다룬 두 게임의 영상을 보겠다. Assassin's Creed 3은 미국 독립전쟁이고, Battle Game of Freedom은 미국 남북전쟁이라 엄밀히 따지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맥락을 보자. 먼저 Assassin's Creed 3의 트레일러이다.
위는 유비소프트의 명작 게임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 3의 트레일러이다. 트레일러는 혼자서 화려하게 군인들을 학살하며 무쌍을 찍는 주인공 코너를 보여준다. 그는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이 게임의 주인공이고, 그가 하는 퀘스트가 게임의 스토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우린 주인공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주인공에게 죽어가는 주변인물들로 태어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한편, 이 영상은 'Battle Cry of Freedom'이라는 게임 플레이 영상이다. 미국 남북전쟁이 배경인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깃발을 든 기수를 하거나 피리부는 악기병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게임 리뷰 유튜브 영상 제목은 '전쟁터에서 피리 부는 게임'이다. 유머러스하다. 게임 플레이 영상을 보면 플레이어는 대포를 쏘다가 대포의 반동에 의해 몸이 깔려 죽을 수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분명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죽음이다. 차라리 어쌔신 크리드 3의 주인공 존 코너에게 죽는다면 잠시나마 스토리에 나올수나 있지, 포병 부대의 대포 반동에 깔려 죽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린 저 영상 썸네일의 군번 '375500' 피리부는 악기병 아저씨처럼 평범한 졸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졸병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죽어가기 마련이다.
중국이 항복을 하든지 복수를 하든지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거였다.
세상이 어찌 변하든 그들은 그저 텃밭의 잡초를 뽑아야 했고, 신발이라도 신고 다니려면 짚신을 만들어야 했으며, 닭을 훔치러 들어오는 도둑들을 쫓아내야 했다. (파친코 1권, 25p)
다시 소설 '파친코'로 돌아와보자. 소설의 인물들에게 중일전쟁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먼나라 이야기였으며 그보다는 자기 밭의 잡초 뽑기와 닭을 훔치는 도둑들을 쫓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들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연표로 배우는 역사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헤겔도 말하지 않았나, 세계정신은 추상적이고 거대한 개념이라고.
자, 그렇다면 소설의 첫문장, '역사가 우릴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에서 '역사'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 이해했을 것 같다.
역사는 우릴 저버렸지만
그렇다면 '저버렸지만'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소설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아무 죄없는 희생자가 된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랬지만 그중에서도 '백요셉'의 예시를 들고 싶다. 백요셉은 백이삭의 형으로써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이다. 그는 일본인이 주인인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내 경희와 동생 이삭의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이 책임감이 그를 비극적 운명으로 이끌고 간다. 태평양 전쟁 말기, 요셉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더 좋은 직장이 있다는 말에 폭격이 임박했다는 한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로 간다. 때는 1945년 8월이었다.
그날 오후 일찍 친구의 친구가 요셉의 비스킷 공장에 들러서 나가사키의 제강소에서 조선인 근로자들을 관리해줄 감독관을 찾는다고 말했다. 남자들에게 방과 식사를 제공해주는 주거지가 있다고 했지만 가족은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봉급은 현재의 거의 세 배 였다. (파친코 1권 313p)
3배의 봉급은 가난한 요셉에게 크나큰 유혹이 되었다. 가족과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는 요셉을 저버렸다. 하필 그 시기는 1945년이었고 하필 장소는 나가사키였다. 불길한 조합이다. 원자폭탄이다. 요셉은 원폭의 피해자가 된다.
요셉의 입과 뺨은 동물에게 잡아 뜯긴 것처럼 반쯤 사라지고 없었다.
요셉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사람이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나갔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파친코 1권 335p)
오히려 그의 병환은 온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고 가족을 가난으로 내몬다. 그는 나쁜 짓을 한적도 없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인들이 일으켰고 그는 그저 가족을 부양하러 나가사키로 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때문에 피폭자가 되고 가족에 크나큰 짐이 된다. 너무나도 슬픈 운명의 장난이다. 그야말로 역사는 그들을 저버린 것이다. 신이 있다면, 악한 자를 벌하고 선한 자에겐 상을 주셔야 하는데, 도대체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요셉에게 이러한 시련이 오는 것인가. 잔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관 없다
너무나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다. 요셉만 이런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가혹한 역사의 흐름에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소설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삶의 태도이다. 소설의 끝에서 선자는 옥살이 끝에 죽은 남편 이삭의 묘를 방문한다. 그녀는 수많은 운명의 가혹한 시련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끈질기게 아름답게 살아왔다. 아무리 운명이 그녀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끈질기고 또 끈질기게 버텨온 것이다.
우리는 나폴레옹으로 태어나지 않고, 군번 375500번의 피리부는 군악대병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운명의 장난 아래에 죽어간다. 그래서 헤겔이 말하는 역사는 너무나도 잔인하다. '역사'는 개개인을 소모품으로 여긴다. 역사 앞에서 개개인은 하나의 숫자로 치환된다. 하지만 각 숫자들은 그냥 숫자가 아니다. 끈질기게 살아온 개개인의 처절한 삶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비극적이다. 항상 차별받고 억울하게 당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 속 주인공
들은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아왔지만, 인생의 말년에 돌이켜 생각해볼때, 한 많은 인생이지만 위안이 되었던 인생이라 고백한다.
위안이 되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들은 항상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파친코 2권 378p)
선자는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가 죽은 남편 백이삭의 묘에 찾아가는 길에 이렇게 생각한다. 슬픈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주변에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삶을 살면서 '사랑'을 배웠다. 남편 이삭을 통해 그녀는 사랑을 알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자는 이삭의 무덤에 뭔가 사랑스러운 것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살면서 이삭은 선자에게 너무나 적은 것을 요구했다.
남편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아름다움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친코 2권 376p)
힘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그들처럼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다.
소설의 첫문장처럼 역사가 그들을 버릴지라도 상관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인 '이삭', '노아', '모세(모자수)', '요셉', '솔로몬' 등에서 따왔다. 그들의 이름만 봐도 알수 있듯이 이 소설은 재일교포를 소재로 함과 동시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선자의 남편 '이삭'은 오사카에서 한인교회를 운영하는 목사이기도 하다. 이번 포스팅에서 이 책의 개괄적인 메시지를 다루었으니 추후의 포스팅에서는 이 책의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해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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