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친코(3): 백이삭의 시련

이렁비니 2024. 3. 12. 00:28

소설 파친코에서 백이삭의 형, '백요셉'은 오사카에 온 동생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인 문제들이나 노동 조직에 관계된 것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쓸데없는 것들하고는 엮이지 마.
고개 숙이고 일만 해. 독립운동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짓거리에 휩쓸리거나 휘둘리지 말라는 얘기야.
(파친코 1권 168p)

 

형 백요셉은 동생 백이삭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가 걱정이 되었다. 백이삭에겐 아내 선자와 뱃속의 아기가 있었다. 그래서 행여나 백이삭이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일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백이삭은 기독교 목사였고, 그가 생각하기에 압제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인다운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있던 평양에서는 수많은 신학대학 졸업생들과 교수들이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미 잡혀들어갈 것이란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백이삭에겐 책임져야 할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백요셉은 이것이 걱정되었다. 

요셉은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요셉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뭔가 더 위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파친코 1권 236p)

 

백이삭도 이에 어느정도 동의했다. 이상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에게도 아내와 아들을 가장으로서 책임지는 일은 점점 중요해지는 반면, 이상은 너무나도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할 때, 백이삭의 교회 성도 중 한명인 중국인 '후'가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변호하려다가 백이삭은 같이 감옥에 갇힌다.

경찰이 오늘 아침에 그분들을 잡아갔어요.
다들 신토 신사에 참배하러 갔는데 관리하던 사람이 후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할 때
주기도문 외우는 걸 알아챘어요. 경찰이 후를 심문했고, 후는 신사참배 의식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며
더 이상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파친코 1권 232p)

 

백이삭은 후를 변호하려했으나 이내 경찰서로 잡혀들어갔다. 그리고 몇년간의 옥고를 치룬 후, 죽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백이삭의 아내, 선자와 형 백요셉 가족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선자는 과부가 되었고, 백요셉은 동생을 잃었으며, 선자의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아버지를 잃었다. 누가 봐도 백요셉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실패해서 개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백이삭이 겪은 시련의 의미는 무엇인가?

백이삭은 왜 시련을 겪은 것인가?

백이삭이 겪은 시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죽은 것이다. 차라리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것이라면 덜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는 주기도문을 외운 자신의 교회 신자를 변호하려다가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은 가족들을 깊은 슬픔의 길로 인도해버렸다.그의 아들 백노아는 심지어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 

심지어는 가장 좋아하는 큰아버지에게도 밝히지 않은 가장 큰 비밀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온화하고 친절한 아버지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 갇히게 내버려두었다.
2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다고 한 아버지의 말과는 달랐다.
(파친코 1권 270p)

 

이삭의 의미없는 시련과 희생은 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다. 백이삭은 목사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노아의 아버지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는 목사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라나길 기도했다. 그래서 백이삭의 아들은 '노아'가 되었다.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한 노아. 그 이름처럼 노아가 자라나길 바랐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백이삭의 의미없는 희생은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이삭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큰 희생이었다.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아끼는 자신의 아들이 신앙을 잃는 것.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큰 희생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한 백이삭의 죽음의 의미.

백이삭은 사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 신자, 중국인 '후'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후'가 백이삭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는가? 그건 모른다. 소설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맥락에 비추어보았을 때 후 또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한독립이라는 대의적 명분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정말 넓게 봐서 납득할 수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전재산과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등... 이런 독립투사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백이삭은 다르다. 그는 안중근처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지도, 윤봉길 의사처럼 도시락 폭탄을 던지지도, 이봉창 의사처럼 천황 암살 미수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주기도문을 조금 중얼거린 후를 변호하려 했을 뿐이다. 안중근 의사의 총성은 동아시아의 세계 정세를 바꾸어놓았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장제스로부터 인정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봉창 천황 암살 미수사건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 전역을 화들짝 뒤집어놓은 사건이었다. 그들에게 천황은 신이었다. 감히 신을 암살하려하다니!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독립운동에 비하면 백이삭의 행동은 너무나 미미하다...

 

이봉창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윤봉길은 집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丈夫出家 生不還(장부출가 생불환). 사내 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두 독립운동가 모두 엄청난 포부 만큼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책에도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백이삭의 행동은 어떤가. 백이삭의 행동은 그 파장이 너무나도 작았다. 아니, 파장이 아예 없었다. 그냥 몇마디 중얼거린 자신의 교회 신자인 후를 변호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 변호로 백이삭은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 그가 후대에 역사책에 기록될만한 일을 했는가? 아니다. 정말로 너무나도 무기력한 행동이었다. 그는 사실 독립운동을 한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도였던 후를 변호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죽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하나님을 버렸다. 가장이 파탄난 것이다. 정말 무의미한 죽음이다. 만약 윤봉길이나 이봉창 의사처럼 큰 일을 했으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백이삭의 가족들만 고난 가운데 남겨졌다. 백이삭이 겪은 고난과 독립운동가들이 겪은 고난을 한번 비교해보자.

  독립운동가(윤봉길, 이봉창 등) 백이삭
왜 시련을 당했는가? 대한독립을 위해 자신의 교회 신자 '후'를 변호하기 위해
행동의 동기?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적 명분을 위해. 자신의 어린 양을 보호하려는 교회 신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성과가 있었는가? 있었음.
현재 대한민국 건국에 큰 영향을 미침.
없음.
'후'는 감옥에 갇히게 됨. 이후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음. 아마 감옥에서 죽었을 것이라 추측됨.
역사에 기록되었는가? 그렇다. 교과서에도 기록됨. 아님.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길게 보면 성공적. 대한독립이 이루어졌기에.
짧게 봐도 성공적.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줌.
철저한 실패. 본인은 죽고 아내는 과부가 되고, 형은 동생을 잃었으며, 아들은 신앙을 잃어버림. 가정파탄의 끝판왕.
결론 그당시에는 무의미한 저항처럼 보였겠지만, 결국 수십년이 지난 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기억됨.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함.
정말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성공? 실패? 성공한 것처럼 보임? 실패한 것처럼 보임?

 

이봉창 의사처럼 사내대장부가 이왕 자신의 목숨을 바칠거면 천황정도는 함께 저승길로 데려가야하지 않을까. 백이삭은 소인배다. 그는 자신의 교회 신도 '후'를 살리기 위해 죽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았는가? 아니다. 같이 감옥에 잡혀들어갔다. 백이삭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어쩌다보니 죽었다. 


백이삭이 고난을 택한 이유. 사랑.

나는 백이삭이 고난을 택한 이유가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삭 또한 생각을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이삭은 압제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인다운 행동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몇달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상은 일과 선자(아내)에게 밀려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해야했다.
(파친코 1권, 169p)

 

과거의 이삭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평양에서 그는 3.1운동의 부흥을 목격했다. 수많은 신학생들이 그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이제 이삭에겐 가족이 생겼다. 그에겐 가족의 생계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생겼고, 독립운동은 너무나 먼 이상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고난의 이유로 독립운동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고난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자신의 교회 성도인 '후'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그는 '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셈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노아의 신앙마저 버리게 된 것이다... 정말 비합리적이고 크나큰 희생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비합리적이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냥 행한다. 길 잃은 어린 양 한마리를 찾는 것이 나머지 99마리의 양보다 더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가 99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만약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 잃지 않은 99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욱 기뻐할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12-13절)

 

사랑은 비합리적이다. 사랑은 양 100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해서 나머지 99마리를 두고 오는 것이다. 

백이삭은 자신의 교회 성도, '후'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가정이 파탄나버렸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럴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99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1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이다.

말이 안된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가 99마리의 양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냐. 그럴수도 있다. 더 심한 경우에는 길 잃은 양을 찾지 못하고 99마리의 양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100마리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사야서 53장 6절처럼'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갈길로 흩어져 버리게 된 것이다. 양을 다 잃어버린 목자. 자리에 주저앉아 슬피 우는 것 외에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자는 양을 찾으러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슬프다. 이렇게밖에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백이삭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직접 실천했다. 자신의 어린 양, '후'를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자신의 가족, 아들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