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파친코(2): 백이삭의 대화 1

이렁비니 2024. 3. 7. 01:18

앞서 한번 포스팅한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파친코'는 재일교포들의 인생을 다룬 대하소설이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으며, 애플TV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그중, 개인적으로 백이삭 목사와 신 목사의 대화가 인상깊었다. 해당 대화만을 가지고 여러개의 포스팅을 할 수 있을정도로 얘깃거리가 많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중 한가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주님의 감정

백이삭은 한수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모른채 그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구약의 호세아서를 묵상한 후, 신 목사에게 가서 이러한 그의 결심을 전한다. 그리고 이삭은 신 목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느끼시는지 우리가 이해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신목사는 이렇게 답한다.

물론이지.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려워하고, 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실게 분명하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거야. 우리가 홀로 고통 받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때 말이야.
(파친코 1권 중)

여기에서 주님의 감정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신목사의 말에 집중해보자. 한국인들의 특징은 굉장히 감정적이란 것이다. '감정'. 이것은 한국인들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알고,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헤아린다는 '눈치'라는 단어도 대한민국에만 있는 단어이다.

 

이 '감정'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한국의 아침드라마이다. 아침드라마의 플롯은 사실 논리적 전개를 따져보았을 때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숨겨진 딸이 있다는 둥, 몇억을 줄테니 자기 아들하고 헤어지자는 둥... 이러한 에피소드는 사실 현실성이 그닥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이런 에피소드는 보는 관객들의 감정을 격하게 컨트롤한다. 그래서 아침드라마의 플롯은 단순하다. 악역은 표정과 옷차림만 봐도 악역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플롯과 캐릭터는 단순하지만, 대신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파도는 엄청나다. 한국인들이 이러한 아침드라마에 빠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플롯은 단순하지만, '아이고, 저 나쁜X'라며 욕하면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감정의 표출인 것이다. 캐릭터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같이 희노애락을 느끼는 것. 이것 때문에 그들은 아침드라마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드라마의 짤방들. 스틸샷만 보아도 얼마나 감정이 화끈하게 표출되는지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의견에 대해 반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한국인들은 그다지 감정적이지 않다, 라고 말이다. 한국에는 한국인 정서상,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드라마가 있다. 그것은 셜록 홈즈와 같은 정통 추리물이다. 셜록 홈즈는 감정이나 육감이 아닌 오직 이성만으로 판단해 추리한다. 이러한 이성적 추리는, 감정이 중심이 되는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다.

셜록 흠즈. 그는 감정이 아닌 냉철한 두뇌와 이성을 이용해 범인을 추리해낸다.

 

하지만 서구권에서는 감정보단 이성이 항상 앞섰다. 이성은 항상 옳았고,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허점이 생긴다. BBC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우리나라의 아침드라마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 홈즈는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범인을 찾아낸다. 여기에는 셜록 홈즈의 어떠한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의 감정이 들어가는 순간, 그의 추리에는 오류가 생기고 만다. 


 

성경을 읽는 법

성경을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성경을 읽기도 한다. 혹은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을 수도 있다. 혹은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성경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을 수도 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을 때, 얼마나 하나님께서 안타까움을 느끼셨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에도 얼마나 슬펐을까, 이것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정을 묵상하는 것.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감정이었을까'를 많이 생각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성경의 구절들이 수천년 전 먼 나라, 낯선 민족의 역사 이야기로만 다가올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감정'을 놓고 성경을 읽는다면 달라진다. '감정'을 이해하고 이를 공감할 때 성경은 수많은 안타까움으로 뒤덮인다. 수없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돌아섬, 등의 사건이 그저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고 찢어지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백이삭은  '하나님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호세아서를 읽었다. 그는 호세아서를 묵상하고 이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선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파친코의 소설 배경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부산이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당시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결혼한다는 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왜 굳이? 라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이삭은 선자를 선택했다. 선자는 이삭의 청혼을 승낙했고, 그둘은 일본 오사카로 이사했다. 백이삭의 결단은 선자를 실제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구원했다. 비록 수많은 삶의 애환들은 여전히 선자와 이삭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은 아름다웠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상관 없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