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친코와 엔도 슈사쿠

이렁비니 2024. 3. 19. 23:35

소설 파친코에는 선자의 남편인 백이삭 목사가 일하는 교회에 담임 목사인 류 목사가 나온다. 류 목사는 현재 한가지 딜레마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 신사참배가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신도들은 일본 경찰들에게 잡혀갈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양심을 지킬 것인가, 혹은 신도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할 것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신실하고 실용적인 류 목사는 신사참배가 이교도적 의식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과 후, 신도들에게 더 위대한 선을 위해서 신사참배에 참석하라고 했다.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많은 신도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류 목사는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을 찾았다.
(파친코 1권 242p)

 

일제강점기의 시기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탄압에 저항해왔다. 그들은 3.1운동이나 신사참배 거부와 같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켜왔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친일 행위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과 악은 그렇게 무자르듯이 쉽게 양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류 목사처럼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어쩔 수 없이 한 경우도 있을테니 말이다. 사실 '파친코'의 류 목사만 이러한 딜레마에 빠진 것은 아니다.


신을 배신하다 : '침묵'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는 '후미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후미에(踏み絵 (ふみえ))는 일본어로 '밟는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과거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의 기독교도인들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다이묘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진 그림을 놓고, 사람들을 불러 이를 밟게 했다. 이 그림을 '후미에'라고 불렀고,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차마 이 그림을 밟지 못했다. 그렇게 발각된 가톨릭 신자들은 강제적으로 잡혀갔고 수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소설 '침묵'의 명장면 중 하나, 후미에를 밟기 전,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로드리고 신부에게 후미에를 밟아도 되는지 묻는다. 그러자 그는 후미에를 밟아도 좋다고 답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신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았을 때에 후미에를 밟는다는 것은 '배교', 즉, 기독교를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연약하게 태어난 인간들이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초인적인 믿음이 생겨나서 모든 고난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눈물을 머금고 후미에를 밟는다.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색출하고 탄압하기 위해 사용한 '후미에'. 그리고 이를 밟는 행위를 '에부미'(그림 밟기)라고 말한다.

“성화를 제가 좋아서 밟은 줄 아십니까? 성화를 밟은 이 발은 아프고 쓰립니다. 정말 못 견디게 아프답니다. 저를 이렇게 약골로 태어나게 해놓고서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하느님께선 말씀하십니다. 그건 너무 무리입니다.” 
(소설 '침묵', '기쿠지로'의 대사 중.)

 

그런 의미에서 소설 '침묵'에서 기쿠지로가 말한 이 대사는 애절하다. 기쿠지로는 로드리고 신부가 무사히 일본 땅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결정적인 순간일 때마다 하느님을 배신하고만다. 그는 결코 담대하게 순교의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도 원망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인간인것을... 수많은 일본인들이 후미에를 밟는다. 그리고 그들의 발 아래에 수없이 밟힌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그는 끊임없이 밟혀 그 형체가 다 닳아 없어졌다. 

 

신부는 발을 올렸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있는 것을 밟는 것이었다.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 
(소설 '침묵' 중)

 

소설의 마지막, 결국 참다못한 로드리고 신부 또한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를 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는 아예 일본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결국 자신이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한층 더 깊은 차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주한다. 이를 냉정하게 본다면 자기합리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소설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처절한 극한의 상황까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나 다 결국 배교를 할 수 밖에 없을것 같기도 하다. 소설은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를 정죄하지 않는다. 작가는 로드리고 신부를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조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밟은 탓으로, 동판이 박힌 판대기에는 거무스레한 엄지발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너무나 밟힌 탓에 움푹 파이고 마멸돼있었다. 움푹 파인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부를 쳐다보며 호소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괜찮다.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하고 있다.'

(소설, '침묵' 중)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밟는 순간, 자신이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그 자신보다도 더 아래에, 낮은 곳에 있으며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인의 강인함: '파친코'의 선자

소설 '침묵'에서 작가가 가장 큰 화두로 던지고 있는 질문은 '신은 왜 침묵하는가'이다. 하지만 소설 '파친코'에서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심리적 갈등을 깊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주인공 선자 또한 그닥 의문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백이삭 목사는 주기도문을 외우는 중국인 신도 '후' 때문에 덩달아 감옥에 잡혀들어간다. 선자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감옥에 갇힌 남편에게 주먹밥을 넣어준다. 

선자는 아침마다 경찰서에 가서 보리와 수수로 만든 주먹밥 세개를 넣어주었다. 계란 살 돈이 있을 때는 계란을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간장에 졸여서 이삭의 부실한 도시락에 함께 넣었다. 그 음식이 이삭에게 확실하게 전달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삭이 도시락을 받지 못한다는 증거도 딱히 없었다.
(소설 '파친코' 중 241p)

 

 

 만약 엔도 슈사쿠가 해당 장면을 묘사했다면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 침묵하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의문을 쏟아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자는 남편이 감옥에 갇혀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선자의 신앙은 죽거나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매일 아침마다 남편에게 주먹밥을 넣어줄 뿐이었다. 선자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여기서 우린 한국인의 신앙관과 일본인의 신앙관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인은 아무리 짓밟혀도 계속해서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들레와 같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신앙심을 보면, '어떻게'라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도 선자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일까? 어떻게 저렇게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의 상황에서도 꿋꿋히 살아나가는 것일까? '어떻게' 이것이 한국인들의 신앙을 관찰하면 드는 의문이다.

 

한편 일본인들의 신앙심을 살펴보면, '왜?'라는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왜 그들은 믿는 것일까? 적어도 엔도 슈사쿠가 그려내고 있는 신앙관은 굉장히 허무적이다. '파친코'의 선자가 고난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다면,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선 고난을 통해 실존적 허무함을 마주한다. 아마 불교 문화의 영향이 컸던 만큼, '공(空)'의 개념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다 '공(空)'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허무함'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침묵'에서 그 모든 고난의 끝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한다. 이것은 허무하다. 마치 자신이 믿고 있던 '하느님'이란 존재가 실은 없는 존재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실존적 자아를 마주하는 것은 그들에겐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침묵하는 하느님을 보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파친코의 선자는 단 한번도 이러한 의문을 가진적이 없었다. 그래서 선자의 단단함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저런 시련을 버티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든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사해 부근에서'에 매일 주먹밥을 넣어주는 선자의 케이스와 비슷한 케이스가 나온다. 때는 1940년대, 일본은 전시체제에 들어가게 되며 모든 물자는 부족해진다. 특히 신선한 우유는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적국의 종교를 믿는 가톨릭 학교에선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은 한 성도를 위해 신선한 우유를 어렵사리 구해주었다. 하지만 이내 신부님의 사랑이 담긴 우유는 이내 담배와 물물교환되고, 그 성도는 담배를 홀라당 다 피워버린다. 결국 신부님이 매번 어렵사리 구해준 우유는 아무런 의미없이 사라져버린다.

 

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선자가 감옥에 갇힌 남편에게 매일마다 넣어주는 주먹밥은 그에게 단 한번도 제대로 전달된적이 없다. 하지만 작가 이민진은 이 사실에 집중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소설은 굉장히 허무주의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선자의 강인한 면을 부각시킨다. 선자는 당장 닥쳐온 고난에 무너지지 않는다. 수많은 고민거리와 슬픔이 있었지만 선자에겐 돌봐야할 아들이 있었다.

이삭이 투옥된 지 일주일 후, 선자는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감옥에 가서 이삭의 식사를 넣어주고 나서, 커다란 김치 항아리를 나무 수레에 싣고 시장으로 밀고 갔다.
(파친코 1권 244p)

 

남편이 억울하게 잡혀들어간지 단 일주일만이었다. 참 강인한 한국인이다.